지역사회 혼란·정신의료기관 인력 대량 실직·전공의 수련환경 악화 부작용
정신의학계 "정신 병·의원 시설기준 엄청난 혼돈 초래...강력 저항" 경고
정신의학계가 정부가 추진 중인 정신의료기관 시설 기준 강화방안을 원점 재논의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감염예방이라는 제도 개선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요구 수준이 너무 높아 오히려 기존 정신질환 진료체계에 엄청난 혼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다.
일례로 정부는 정신의료기관 입원실 당 병상 수를 최대 10병상에서 6병상으로 줄이고, 병상 면적기준 또한 급성기 병원보다 그 기준을 높여 적용하기로 했다.
이 기준을 맞추자면 정신의료기관 입장에서는 병상 수를 대폭 축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현재로서는 이렇게 빠져나온 환자들에 대한 대책도, 그에 맞춰 줄어들 정신의료기관 종사자들에 대책도 마련되지 않아 혼란이 예상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노인정신의학회·생물정신의학회·생물치료정신의학회·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여성정신의학회·우울조울병학회·정신약물학회·조현병학회·정신신체의학회·중독정신의학회·불안의학회·수면의학회·정신분석학회 등은 4일 공동 성명을 내어 현재 입법예고 중인 정신건강복지법 시행규칙을 "코로나19 사태 극복 후 원점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먼저 정부가 추진 중인 시설 기준 강화의 근거가 명확치 않다고 밝혔다.
신경정신의학회 등은 "현 개정안이 실태조사와 개선방안 연구 등 현황 파악과 개선 방향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라며 "보건복지부는 2021년 정신건강증진시설 환경평가 및 시설개선 연구를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연구가 시작되기도 전에 시행규칙부터 발표하는 상황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내용 면에서도 효과적이지 않다고 봤다. 기준 자체가 워낙 높아 현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데다, 수가 등의 면에서 열악한 정신의료기관에 급성기 병상보다 높은 시설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신경정신의학회 등은 "수가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개선책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병실급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는 곧 정신응급의료시스템의 붕괴와 지역사회 혼란, 정신의료기관 근무 인력의 대량 실직, 전공의 수련환경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코로나19 사태 안정화 이후 논의를 통해 합리적인 기준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한 정신의학계는 "보건복지부가 충분한 논의를 통해 원점에서 재논의하지 않을 경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잘못된 시행규칙의 개정에 저항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신건강복지법 시행규칙: 정신의료기관의 시설 및 장비기준 관련 개정에 대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성명서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코로나19 사태에서 심리방역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국민들에게 심리방역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보건복지부와 협력하여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최대한 협조해 왔다. 정신의료기관을 운영하는 회원들은 코로나로부터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서 어려움을 감내하며 정부의 방역정책에 협조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입법예고된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정신건강복지법) 시행규칙 개정안은 현재까지도 어렵게 유지되어 오고 있는 정신질환 진료 체계에 엄청난 혼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바이다.
보건복지부는 정신의료기관의 환자 및 의료진 안전과 입원실 환경의 개선을 위해 정신건강복지법 시행규칙을 2020년 11월 26일 입법예고하였다. 시행규칙의 내용은 감염에 취약한 정신병동의 감염예방과 관리강화를 위한 격리병실 설치, 입원실 병상기준 강화와 정신의료기관의 안전관리 강화를 위한 비상경보장치, 보안 전담인력, 진료실 비상문의 설치 근거를 담고 있다.
입법예고 주요 내용은 ▲입원실 당 병상 수를 최대 10병상에서 6병상 이하로 줄이고 ▲입원실 면적 기준을 현행 1인실 6.3㎡에서 10㎡로, 다인실은 환자 1인당 4.3㎡에서 6.3㎡로 강화 ▲병상 간 이격거리는 1.5m 이상 두도록 하는 것이다. ▲입원실에 화장실과 손 씻기 및 환기 시설을 설치하고 ▲300병상 이상 정신병원은 감염병 예방을 위한 격리병실을 별도로 두도록 했다.
특히 정부는 입법예고를 거쳐 내년 3월 5일부터 시설 및 규격기준을 적용할 방침으로, 시행일 후 신규 개설 허가 신청 정신의료기관에는 모두 이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코로나가 엄중한 상황에서 정신의료기관의 안전과 감염예방을 위한 관심과 개선의 취지에는 동의하며, 우리 학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요청해 온 사항이 포함된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한 정책도 의료현장의 현실에 맞지 않을 경우 취지와는 달리 개정 시행규칙의 통과 이후는 돌이키기 어려운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되어 코로나19 사태 극복 후 원점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먼저 현 개정안이 실태조사와 개선방안 연구 등 현황 파악과 개선 방향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 보건복지부는 2021년 정신건강증진시설 환경평가 및 시설개선 연구를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연구가 시작되기도 전에 시행규칙부터 발표하는 상황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법개정 취지의 중요한 배경인 바이러스 감염 차단에 현재의 개정안이 정신의료기관의 병실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리고자 한다. 현재 일반 병원의 경우 입원실 면적 기준 1인당 4.3㎡, 병상 간 이격거리 1m 수준의 시설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데, 이 기준도 메르스 이후 강화된 기준이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에 정신의료기관 시설기준을 이보다 높은 병상 면적기준인 1인당 6.3㎡, 이격거리 1.5m로 정한 것은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
건물을 임대하여 운영중인 정신병상들은 대개 급성기 입원치료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시설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공사가 임대 상황에서 여의치 않다. 그런데 개정안은 주소지 이전이나 개설변경을 하는 경우도 적용하도록 하여 2년의 유예기간조차 의미가 상실된다. 정신의료기관의 수가와 의료급여 정액수가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개선책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병실 급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신질환의 일상으로의 회복을 위해 정신재활프로그램이 입원치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로 인해 병상에 있기 보다는 작업치료실에 행해지는 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간이 많은 특성이 있다.
재활프로그램의 특성상 밀접한 접촉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에 적합한 이격 거리 증가와 같은 단순한 시설적인 접근은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위해 입원환자들에게 자기의 침상에서 떠나지 말도록 강제하지 않는 이상 감염병 전파 차단에 효과적이지 않다.
실제 1인실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미국 등의 정신병상에서도 집단감염은 빈발하고 있다.
오히려 의료기관들이 시설 기준에 맞춰 생존하기 위해 집단치료실, 재활치료실을 병실로 전환하여 적절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지 못하게 되는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위험성이 높다. 그러므로 정신병동 시설기준에 의료법 기준보다 더 강화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과유불급일 뿐 아니라 실효성이 전무하다.
개정안에서는 화장실의 설치를 신설(또는 변경)되는 정신의료기관에 의무화하고 있으며 손씻기 시설과 환기 시설 역시 기존정신의료기관에는 유예를 두지만 신설(또는 변경)되는 정신의료기관에는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대학병원 등 종합병원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기준이다.
자타해 위험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성기 정신병상에 인력도 늘리지 않고 화장실을 의무화하는 것은 사고위험만 높일 가능성이 높으며 역시 의료법의 적용을 받는 기존 병원 요양병원보다 오히려 높은 기준이다.
무엇보다 급격한 시설 규정의 적용에 따라 2년내로 의원급의 입원병실은 폐업의 수순을 밟게 될 것이며, 150병상의 중소규모 입원시설은 병상 수의 40~50% 정도, 대형정신병원도 병상 수의 4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신질환의 특성상 병상의 간격이 기분 상의 쾌적함을 넘어선 이점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신재활프로그램으로 인한 밀접한 접촉이 예상되어 일괄적인 감염병 전파 차단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병동 기준으로 감염병 차단이 이루어지는 방안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점은 현장에 있는 실무진들은 모두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신의료기관 입원병실 시설기준에 의료법 기준이나 더 강화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현장에서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고 행정서식 상의 논리로 규제를 강행한다면 감염의 통제도 달성하지 못하면서 누구도 원치 않는 급속한 탈수용화로 인한 다음의 부작용들이 발생할 것이다.
첫째, 현재도 불안정한 정신응급의료시스템의 붕괴가 우려된다.
2019년 진주방화사건 이후 조현병에 대한 편견이 확산되고, 신규 정신병원의 개설이 지역사회에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최근 2~3년간 정신응급상황으로 인해 2명의 회원을 잃었고, 다수의 회원들이 진료 현장에서 정신응급 폭력을 수 차례 경험하는 등 정신응급상황이 더 증가했다. 정신질환의 급성악화 시 입원이 어려워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시행규칙의 적용과정에서 특히 도심지역의 입원 병상이 급감하면 응급 및 급성기 입원이 더 어려워지며, 적절한 급성기 치료에 실패하고, 정신응급 사고는 증가하면서 또 편견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둘째, 정신재활 시스템이 없는 급속한 탈수용화는 지역사회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지역사회 재활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속한 탈수용화는 지역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탈수용화란 병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내에서 직접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현재 이런 부분에서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 없는 법개정이 반복되어 심히 우려되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적절한 치료와 보호를 받아야하는 환자의 권리가 상실되며, 이는 온전히 당사자와 가족이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다.
셋째, 급속한 병실 축소로 인한 정신병원 근무 의료인력의 대량 실직사태가 우려된다.
준비되지 않은 병실의 축소로 인해 급작스러운 정신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의료인들의 실직사태가 우려된다. 폐업되는 의원과 중소규모의 병원 병동 직원 전원은 코로나 시국에 바로 실직이 될 것이며, 대형병원의 경우 33%의 직원이 실직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자리를 만들기가 필요한 현시점에서 대량 실직이나 상당한 감봉의 위기를 감염병 예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설 개선 때문에 발생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넷째, 전공의 수련환경이 더욱 열악해진다.
현재도 수익 구조 악화로 대학병원에서 정신병동을 없앤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개정안의 조치로 인해 대학병원을 포함한 수련병원의 병동 운영을 더욱 포기하도록 만들어 정상적인 수련 병동 운영이 어려워진다. 종합병원급 이상의 의료기관에 설치된 정신건강의학과는 현재 응급 및 급성기 정신의료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나 내과·외과에 비해 낮은 수가로 인해 정신건강의학과 보호병동은 최근 5년간 병상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일반병상은 2011~2018년까지 1763병상이 증가한 한편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은 2011년 1021병상에서 2018년 857병상으로 오히려 감소하였고, 2021년 폐쇄가 예정된 기관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현 시행규칙은 이를 가속화할 위험성이 크다. 그러므로 특별한 조치가 없다면 종합병원급 내 정신건강의학과 병상의 감소가 지속되어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수련 환경이 더욱 열악해질 것이며, 초발, 급성기 환자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신체질환을 함께 가진 정신질환자가 치료받는 시스템은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다음 사항을 제안한다.
1) 모든 개정 논의를 정신의료기관 실태조사와 개선방안 연구를 시행하고 현장에 대한 파악과 충분한 여론수렴을 진행한 이후로 연기할 것을 제안한다. 지금은 서로 협력해서 힘을 모아 심리방역에 힘쓰고, 코로나로부터 정신질환자를 보호할 때이다. 그러고 나서 의료법 수준을 감안하고, 정신건강의학과의 치료환경을 감안한 기준을 적용하기를 제안한다. 반목과 대립에 소중한 우리의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2) 정신응급의료시스템의 핵심인 지역사회에 근접한 급성기병동 지원책과 대학병원급의 폐쇄병동의 의무화 등의 특단의 조치를 제안한다. 또한 급성기와 재발한 정신질환자의 신속한 치료를 위해 이송과 치료기관 연결을 위한 정신응급센터 등 제도 정비에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3) 정신의료기관에 안전과 감염예방을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시설기준을 도입한다면 현재의 저수가 상황에서 최소한 정신의료기관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은 수준의 수가 개선책과 개보수에 대한 지원대책을 동시에 발표하거나 시행규칙에 포함해야 한다.
4) 급성기, 아급성기, 지속기 치료에 대한 수가의 차등지급을 통해 급성기 치료 강화를 제안한다. 입원시기에 따른 수가 차별화를 두지 않으면 장기입원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또한 퇴원 후 재활프로그램의 다양화 및 질적 향상을 꾀하여 정신질환자의 회복을 추구하는 정책을 제안한다.
5) 시행규칙 자체와 함께 이후 추진과정에 대해 보건복지부와 정신의료 관련 단체가 TFT를 구성하여 환자 안전과 환경개선 그리고 의료진 안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논의 체계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본 학회는 2021년 1월 5일까지 입법예고된 정신건강복지법 시행규칙의 시행과 관련하여 심각한 위험성을 우려하며 향후 전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결과를 공유할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충분한 논의를 통해 원점에서 재논의하지 않을 경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잘못된 시행규칙의 개정에 저항할 것임을 천명한다.
2020년 1월 4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박용천
대한노인정신의학회 이사장 김성윤
대한생물정신의학회 이사장 김종우
대한생물치료정신의학회 이사장 제영묘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이사장 신동원
한국여성정신의학회 이사장 김선아
대한우울조울병학회 이사장 전덕인
대한정신약물학회 이사장 이상열
대한조현병학회 이사장 주연호
한국정신신체의학회 이사장 정종현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 김대진
대한불안의학회 이사장 서호석
대한수면의학회 이사장 이헌정
한국정신분석학회 회장 김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