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광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예방의학)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말로 번역해 쓰는 '휴머니즘(Humanism)'은 중세 문예 부흥기에 그리스도교 신적(神的)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인간중심주의 정신운동이다. 인간 존재 자체를 중요시하고, 인간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무엇보다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이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은 단지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다거나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태도 이상으로 인간의 행복과 복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이 시기 이후의 의학은 한동안 휴머니즘을 가장 적절하게 실천하는 학문이며 기술이었던 셈이다. 이는, 의학이 일찍부터 소위 신적인 요소들, 예컨대 주술(呪術)이나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탈출하여 인체 해부나 생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질병을 진단 치료하는 기술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의학이 인체와 질병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인체 연구를 시작한 것은 대체로 16세기 때의 일이다. 벨기에의 해부학자 베잘리우스(1514-1564년)와 영국의 생리학자 하베이(1578-1657년)에 의한 인체 해부 및 혈액 순환에 관한 연구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가 인체의 '신성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당시 교회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이후 더 빠른 속도로 과학적 방법에 입각한 인간학으로 학문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이 일은 과학을 신봉하고 의학을 순전히 과학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 나아가서는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고까지 확신하게 했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의학기술은 지구상 많은 질병을 퇴치함으로써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고, 건강 수준을 향상해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까닭으로, 당시 의학은 가히 모든 과학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학문이라는 의미의 '제왕적 과학'(Imperial science)으로 불렸으며, 의사는 최고의 '휴머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나, 최근 들어 생명과학으로서의 의학은 그 정체성에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여러 가지 반(反) 생명적 의학기술들, 예컨대 인공임신중절이나 안락사까지도 의료기술을 사용하고 있으며, 난치병 치료를 위한 약물과 기술 개발을 이유로 이미 수정된 배아를 파괴하는 비윤리적 연구들이 크게 유행하면서 의학이 진정 인간을 위한 과학인지에 대해 많은 윤리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하나의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되면서 시작된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의사들에게 있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반생명적 현상들은 확실히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의학을 사회에 적용하는 의료 활동에서 일부 의사들의 불친절과 비윤리적 진료가 보편화함으로써, 한때 의학이 보여준 인간주의적 휴머니즘은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년)는 현대의학의 과학적 발전이 의사를 단지 '전문 기능인'으로 변질시켜, 환자-의사 관계를 '비인격적' 관계로 전락시켰다고 했다. 의학의 과학적 발달이 휴머니즘을 왜곡시켰다는 말이다.
1970년대 미국의 저명한 면역학 의학자이며 과학저술가인 루이스.토머스(Lewis Thomas, 1913-1993년)는 1975년 '국가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받은 산문집 <The Lives of a Cell>에서 의학기술을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해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의학기술을 소위 '비(非) 기술(non-technology)'로 불리는 돌봄 기술(caring)과, '절반의 기술(half-technology)'로 불리는 대증적(對症的) 치료기술, 그리고 원인적 질병 치료 기술인 항생제 개발이나 백신 생산과 같은 소위 '고도 첨단기술(high-technology)'로 구분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의학이 경쟁적으로 심혈을 기울이는 기술은 거의 모두가 절반의 기술이며, 이것이 결국 의료비만 상승시키고 의학의 진정한 발전을 더디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비(非) 기술', 즉 환자를 편안하게 돌보는 기술은 지금도 훌륭한 의사일수록 갖춰야 하는 덕목이며,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어 이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고 치료하는 첨단 기술이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을 발휘한다고 했다.
<사피엔스, Sapience>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 )도 최근 첨단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부 생명 연구들이 자칫 여러 가지 반(反) 생명적 부작용을 초래하여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특히 이 분야 연구와 산업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이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까지 했다.
의학이 추구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거나 환자를 질병 치료의 대상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다는 이유로 인간 생명 자체를 도구화하는 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진정한 휴머니즘일 수 없기 때문이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