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청, 전문직 자율규제 '편견' 여전...정부도 관치 수준 면허관리 인식 없어
안덕선 고려대 명예교수 "직업전문성 확립 위해 '자율규제' 법적 근거 확보해야"
"전문직 자율규제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재하다. 자율규제에 대한 인식과 제도는 동아시아 개발도상국보다도 못한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안덕선 고려대 명예교수(전 의료정책연구소장)은 5일 의료윤리연구회가 주최한 월례모임에서 '대한의사면허관리원(안) 설립-법적 지위와 역할' 주제 강의를 통해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고, 최선의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의료 전문가가 주도하는 자율규제시스템을 갖추고, 법적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OECD 선진국은 물론 동남아 개발도상국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전문가 자율규제시스템을 아직도 갖추지 못한 이유에 대해 안 명예교수는 "면허관리기구의 설립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보건복지부, 전문직 자율규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법조계의 회의적인 시각, 비윤리적 의료는 형사처벌 대상으로 인식하는 정치인, 현대적인 전문직 관리에 편견을 갖고 있는 당정청 등의 전근대적이고 반근대적인 시각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언론이나 사회는 전문직 면허관리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없다보니 자율규제를 통한 면허관리가 의사들을 감싸기만 할 것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면허 관리와 규제 권한이 있는 보건복지부 역시 의사단체가 면허관리를 하면 끼리끼리 보호하게 될 것이라며 권한을 넘겨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환자를 진료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의사라는 직업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인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의사"라고 밝힌 안 명예교수는 "정부 관료는 전문직업성에 대해 사전 예방·설득·교육 등을 할 수 있는 자체적인 기전이나 역량이 없다"면서 "의료계 자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국민의 건강 보호와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의사면허관리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 명예교수는 "비윤리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회적으로 의료계 자정 요구는 크지만 현행 의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사면허와 관련한 중앙윤리위원회의 권한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행정처분(1년 이하의 자격정지)을 요구하는 것 밖에 없다"면서 "윤리위에서 할 수 있는 자체 징계 역시 3년 이하의 회원권리정지·위반금 부과·경고 및 시정 지시뿐이다. 회원 권리를 정지한다고 진료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별다른 불이익이 없으니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현행 제도의 한계점을 짚었다.
안 명예교수는 현행 의료법상 규정한 중앙윤리위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적인 면허관리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 주도가 아닌 민간 자율의 의사면허관리원을 설립해야 한다는데 방점을 찍었다.
안 명예교수는 "의료행위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왜 이 의료인이 직업을 수행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의사"라면서 "의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의사가 자율규제와 면허관리를 통해 문제 행위를 걸러내야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면서 최선의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이 의사면허관리원을 설립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의사면허관리원의 역할로는 ▲면허 발부와 면허 발부 대상자 등록 ▲좋은 의료를 위한 표준 제정 ▲좋은 의료를 위한 의학교육 유도 ▲면허 갱신 ▲보수교육(CPD) 인정 ▲외국면허 인정 ▲수준 이하 의료의 방지·계도 ▲자율 징계 등을 꼽았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자율규제와 직업 전문성 확립을 위해 의사면허관리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의협 대의원회는 2018년 10월 3일 열린 임시 대의원 총회에서 "비윤리 회원에 대한 엄중 징계와 면허를 관리할 수 있도록 자율규제권을 의사전문가단체에 위임하라"고 촉구한 데 이어 2019년 4월 28일 열린 제71차 정기 대의원 총회에서 '직업 전문성 확립을 위한 자율규제 환경 조성'을 수임 사항으로 의결했다.
당시 의협 집행부는 대의원회의 수임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2019년 1월 의사면허관리기구 설립을 위한 TF를 구성, 내부 토론회·국회 토론회를 개최했다. 2019년 11월 제36차 의협 종합학술대회에서는 '평생교육 및 전문직업성 개발'을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열어 외국의 동향을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면허관리에 대한 회원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워크숍과 해외 단기연수 보고회를 개최했으며, 2020년 7월에는 대한의사면허관리원 준비위원회를 결성, 면허기구의 미션·비젼·운영규정·자율규제와 관련한 의료법 일부 개정안 초안도 만들었다.
의협은 올해 예산 계획을 세우면서 의사면허관리원 설립 추진을 준비하기 위한 예산도 확보했다.
안덕선 명예교수는 "의협보다 한 발 뒤늦게 면허관리의 중요성에 눈을 뜬 대한약사회는 내부 조율 작업을 서두른 끝에 지난 1월 약사면허관리원을 정식으로 발족하며 가속도를 내고 있다. 약사회는 약사면허관리원에 회원 신고, 전·출입 관리, 회원 신고 현황 통계, 회원신고서 출력, 연수교육 이수 정보 등을 통합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하며 조직 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날 의료윤리연구회 월례모임 참석자들은 "자율적인 면허 관리를 통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최선의 진료를 다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의료 전문가가 주도하는 자율규제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의사면허관리원 출범에 무게를 실었다.
이명진 초대 의료윤리연구회장은 서울특별시의사회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 참여 경험을 소개하며 "2019년부터 2년 동안 모두 49건을 심의해 사안이 중한 9건은 행정처분을 의뢰하고, 주의 처분 31건, 혐의 없음 6건, 조사 중단 3건, 비의사 고발 1건을 처리했다"며 "전평제 위원들이 직접 방문하거나 면담·서면 조사를 실시했다. 문제가 있는 회원을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히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참석자들은 의학교육계 스스로 각 의과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의 의학교육 과정과 내용을 평가·인증하고 있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대표적인 민간 자율규제 모델이라는 점에도 공감했다.
안덕선 명예교수는 "의학교육평가원은 법적인 근거를 확보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의학교육계 스스로 부실한 교육 환경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면서 "서남의대의 부실한 의학교육 환경을 평가해 폐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의학교육평가원이 의사면허관리원의 성공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지호 의료윤리연구회장은 "비윤리적인 의사, 범죄를 저지른 극소수의 의사는 정부가 아닌 전문가인 의사들이 가장 정확하게 구별해 낼 수 있다"면서 "의료계 자율적인 규제와 면허관리를 통해 철저히 비윤리적인 의료를 구별하는 것이 의료의 질을 높이고 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사들이 스스로 하는 면허관리에 '제 식구 감싸기'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은 기우"라고 밝힌 문 회장은 "대부분의 의사들은 왜 내가 비윤리적인 의사로 인해 같은 부류라는 눈총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다. 이미 여러 의료 선진국에서 의료계가 면허관리 기구를 운영하고 있고, 제식구 감싸기가 아닌 의료의 질 보장임을 증명하고 있다"면서 "진작에 면허관리원이 있었다면 CCTV와 같은 불필요한 논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