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규범적 가치판단 안돼…모르는 것 모른다고 해야 '과학'
불확실한 피해 국가 보상 확대하되 규범적 가치판단 조화 이뤄야
필자는 2021년 11월 16일 자 칼럼에서 예방접종피해보상심의위원회 구성 등 코로나19 백신 피해보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2021년 12월 8일 대한변호사협회 역시 정부가 백신 접종 피해구제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하며 다음 세 가지 제안을 했다.
첫째, 보상심의에 있어 백신과의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정부가 부담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
둘째, 예방접종피해보상전문위원회 구성을 전면 개편해 규범적 가치판단과 피해자 입장의 심의·평가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셋째, 역학조사에 관여한 의사는 피해보상심의위원회에서 배제돼야 한다.
변협이 국가적 난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다만 의사이자 변호사로서 조금 더 분명하게 과학적 인과관계의 규명과 피해보상의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백신 피해의 특징을 비교해 본다.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가습기살균제는 폐라는 특정 장기에 손상을 야기하고 특징적 병변을 동반한다. 따라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제4조에 규정된 입증책임 전환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리고 원인 물질이 상당한 정도로 규명됐기 때문에 사용금지 조치를 통해 또 다른 비극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백신 피해보상에서 문제 되는 질환은 매우 다양하다.
피해보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입증이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에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도 필요하다. '피해보상을 받은 질환과 관련 있는 요인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위 질문에 긍정한다면 코로나19 백신 접종 대상은 크게 줄 것이다. 이것은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을 크게 저해시킨다.
반면 코로나19 백신 접종 대상을 넓히기 위해 인과관계 인정을 엄격하게 한다면 피해보상의 범위는 현재와 같이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백신 접종 후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423명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백신 부작용 인과관계 평가 기준에 따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6%는 인과관계 인정, 33.6%는 결정할 수 없음, 59.6%는 인과관계 부정, 4.2%는 분류 불가능이다.
변협이 제기한 규범적 가치판단도 과학적 판단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적 판단을 무시하고 규범적 판단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인과관계를 결정할 수 없는 33.6%의 영역에 규범적 가치판단이 개입하는 것이 합당하다.
과학적으로 정직하게 판단한 영역에 함부로 규범적 가치판단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좁게는 방역을 위한 과학적 노력을 저해할 수 있고 넓게는 과학과 규범적 가치의 합리적 조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반대로 미지의 영역에 대해 섣불리 인과관계가 있다 혹은 없다고 일도양단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잘 모르는 것은 잘 모른다고 판단하는 것이 과학적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적 인과관계 규명과 피해보상 문제는 구별해 접근해야 한다. 과학적 인과관계 규명은 엄격하게 하고 밝혀진 사실은 앞으로 백신 접종 대상자나 접종 주의사항에 반영해야 한다.
반면 긴급하게 개발된 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해 불확실한 피해에 대해서는 국가적 보상을 확대해야 한다. 과학적으로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정직하게 판단하고, 그 영역에서 규범적 가치판단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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