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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백인백색의사·판사로 세상의 수레바퀴 굴리는 노태헌 판사
백인백색의사·판사로 세상의 수레바퀴 굴리는 노태헌 판사
  • 장유민 의협신문 명예기자(가톨릭관동의대 본과 3학년) jum0111@nate.com
  • 승인 2021.12.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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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선경 기자]ⓒ의협신문 김선경
가정의학과 전문의 출신인 노태헌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민사 2부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다.  [사진=ⓒ의협신문 김선경 기자 photo@kma.org]

바람이 제법 매서운 12월 초 의학 교과서와 법학 서적이 빼곡하게 꽂힌 판사실에서 노태헌 판사를 만났다. 노 판사는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2부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법조계에 몸담은 20여 년 대부분 시간을 민사부에서 보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출신인 만큼 민사부 소속 의료전담 재판부에서 의료 소송을 도맡기도 했지만, 현재 일반 민사부에서 활약 중이다.

의료인 출신 법조인이라면 의료 소송만을 주로 다루리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의학적 지식은 의료 소송 외에도 폭넓게 활용된다고 한다. 가령 폭행 피해자에서 뇌출혈이 있을 때, 다른 소견 없이 뇌 실질 내 출혈만 단독으로 존재하는지 혹은 경막 외 출혈과 동시에 존재하는지에 따라 판단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리적 판단 과정에 의학적 전문 지식이 활용됨으로써 보다 정확한 판결이 가능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시간이 배로 필요했다. 의학과 법학, 하나만으로도 벅찬 길을 동시에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80년대 후반 의료사고만 나면 브로커 개입해 무조건 병원 점거 농성....의사-환자 모두 판결에 불만 품자 정확한 의학적 지식에 근거한 법적 판단 내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자각은 그를 판사의 길로 이끌었다.

1980년대 후반, 그가 서울의대에 갓 입학해 예과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중환자를 진료하다 환자가 잘못되면 병원을 점거해 농성을 벌인다는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의사의 과실을 떠나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면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점차 중환자들은 진료받을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동시에 소송을 해도 의사를 상대로 환자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브로커들이 잇속을 취했습니다."

노 판사는 이러한 악순환이 브로커와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이 아닌 제도권 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보다 정확한 의학적 지식으로 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법조계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

처음에는 변호사를 꿈꾸었지만 결국 판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도,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와 비슷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의료 소송을 믿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입증 책임 완화, 인과관계 추정 등을 인정하는 판례가 나오며 오히려 의사들이 소송을 믿지 못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확한 재판의 필요성을 느끼고, 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가정의학과 전문의 과정을 수료하고, 법조인의 길을 걷는 과정이 전부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금에야 무균적 과정만을 거치더라도 수술 부위에 감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그가 법조계에 막 입문했을 시절만 하더라도 수술 후에 감염이 생기면 무조건 의사의 과실이라고 하는 판례가 많았다.

보다 정확한 의학적 판단을 판결 과정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동료에게 이를 설명해야 했지만, 의학적 배경지식이 전무한 이들을 상대로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다른 법조인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기에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 판사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의료계와 법조계 간 오해를 풀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지상의 가치는 자유이며, 다른 것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도구입니다... 어떤 사회도 더 유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사회 구성원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다른 사람 혹은 사회가 피해를 받는 경우만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죠.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관한 결정은 그 무엇이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사진=김선경 기자]ⓒ의협신문 김선경
노태헌 판사 [사진=김선경 기자]ⓒ의협신문 김선경

기본적으로 의학은 환자의 말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환자의 말을 토대로 진단 계획을 세우고, 치료한다. 그러나 법학은 이를 '다쳤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고 증명하기를 요구한다고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차이는 진단서를 둘러싼 갈등으로 번졌다.

"교통사고로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왔을 때 영상의학적으로 뼈의 손상이 없다면 의사는 이를 염좌라고 판단하고 이에 상응하는 치료를 시행합니다. 진단서에도 염좌라고 기록하죠. 그러나 법원에서는 염좌라는 객관적 증거가 없는데 염좌라고 쓰인 진단서는 허위 진단서라고 판단해요."

의학계와 법조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두 분야 모두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노 판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에게는 법원의 판단과정을 설명하고, 의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본다는 전제하에 객관적 소견의 유무, 배제적 진단 등의 과정을 포함해 써달라고 얘기했다. 반대로 판사들에게는 진단서란 결국 의사의 진료 과정을 작성하는 것이니 법학과는 다른 의학의 접근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노 판사를 통해 두 분야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노 판사는 의료 소송을 위한 기본적인 소통에서부터 입증책임 완화, 임의 비급여,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법률 등 그야말로 대세를 바꾸는 사건들에 참여했다. 노 판사는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판례로 '김 할머니 사건'을 꼽았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이 사건에 재판연구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설명하며 그는 자유가치에 대해 역설했다.

"지상의 가치는 자유이며, 다른 것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도구 내지는 이상"이라고 말하는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인용하기도 했다. "어떤 사회도 더 유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사회 구성원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다른 사람 혹은 사회가 피해를 받는 경우만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죠.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관한 결정은 그 무엇이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사법부의 역할과도 일맥상통한다. 사법부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곳이 아닌 억울한 사람을 돕는 곳"이라고 강조한 그는 권리가 있음에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의무가 있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사법부의 역할이자 자신의 지향점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가꿔나가는 사람도 있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세상을 바꿔나가는 사람도 있다. 의료인이자 법조인이라는 자신의 수식어를 명예롭게 여기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노태헌 판사는 오늘도 세상의 균형을 잡기 위해 두 배의 책임을 짊어진 채로 수레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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