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선택권 작동 위한 기초 토대 '표준화'
의료기록 이전 가능한 전자 차트 호환성 구축
전 세계적으로 1940~1950년대에 복지국가의 황금기가 시작되면서 의료제도는 의사 중심에서 정부 주도 의료제도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이후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 생산적 복지, 제3의 길 등으로 불리는 재편기를 맞이 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료에서만큼은 정부 주도의 의료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제도도 다양한 문제점에 부딪혔다. 공급자·소비자·정부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속에 비용이 증가하고, 이를 억지로 누르는 제도 속에 점차 활력을 잃고 있다. 제도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비효율성이 발생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비효율성을 줄이기 위해 주요 국가는 의료소비자의 힘을 빌리려 한다. 의료소비자의 선택권을 확실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실행 방법은 서비스의 질을 측정하고, 이를 알려서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비자의 소비 습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경증과 중증으로 나눠 살펴보자. 경증은 의료의 질보다는 의료의 접근성과 편의성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감기를 앓고 있다고 명의를 찾아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의료의 질 평가가 필요한 것은 중증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중증은 자료가 있어도 일반인(소비자)이 평가하기 어렵다. 결국 선택은 이를 알 수 있는 정도의 지적 수준과 정보를 확보하고 있는 다른 사람(대개 가까운 의사나 병원 근무 직원)에게 판단과 선택을 부탁한다. 결국은 많이 알려진 의사와 병원을 찾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경증이나 중증이나 일반인에게 자료를 제공해도 활용하기에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보 알림을 지속하는 이유는 소비자에게 선택의 실수를 줄여주기 위함도 있지만 공급자에게는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제대로 된 소비자 중심 의료시대에는 두 가지 제도가 중요하다.
첫째는 표준화이다. 선택권이 작동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토대이다. 진료 절차와 서비스의 종류도 일정 정도 범위 내에서 표준화되어야 하고 가격도 표준화되어야 한다. 표준화가 되었다고 표준화된 규격진료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서는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표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표준화된 제품은 'full cycle of care'이다. 이는 군(郡) 단위 경쟁구조가 유리하다.
벨기에는 건강보험 급여목록에 8000종 이상의 급여 서비스를 명시하고 있다. 표준화를 통해 조건부 급여와 비급여 항목을 명시했다.
독일도 일찍부터 표준화를 하고 있다. 급여 자체도 포괄적 패키지로 공급한다. 질병 예방 및 검진의 급여내역은 사회보건법에 대상 질환·집단 진단 간격·횟수까지 비교적 세세하게 규정이고 있다. 연방공동위원회는 공적 건강보험에서 급여하는 항목에 대해 지속해서 재평가 하고, 필요 시 세부 사항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여 준수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요 국가도 표준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비교 가능한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은 국가이다. 의료소비자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분절된 의료 제공 때문이다.
의사 진찰비·처방료·입원료·외래비 검사비·앰뷸런스비 등 모든 비용이 다 각각이다.
하나의 예로 메디케어를 들 수 있다. 메디케어도 병원 입원 서비스를 보장하는 파트 A와 의사 서비스를 보장하는 파트 B로, 이 둘을 합친 파트 C, 그리고 처방의약품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는 파트 D가 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더 분절이 되어 있다. 이러한 분절은 표준화를 어렵게 하여 비교도 어렵게 했지만 동시에 다른 서비스의 끼워팔기를 가능하게 했다. 앰뷸런스 비용·법무 비용·진료의 경중에 따른 보험료 지급 방법의 변경 규정 등등이다. 이들 분절된 서비스는 비교를 무력화 시킨다. 분절화된 서비스는 비용 상승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교불가 속에 소비자의 시야와 관리에서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다.
결국 전 국민 강제보험이 안 되어 있는 이러한 구조에서 보험사들의 경쟁은 질의 경쟁이 아닌 시장점유율 경쟁으로 변질됐다. 이것이 오늘날의 미국의 의료의 모습이다.
둘째는 이전의 용이성이다 이전이 용이하다는 것은 이 병원(의사)에서 저 병원(의사)로 쉽게 이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의료기록 이전의 용이성과 전자 차트의 호환성이다.
싱가포르는 이러한 이전이 매우 용이하다. MOH Holdings(MOHH)는 싱가포르 보건부 산하의 정부 소속이며, 정부 재원으로 운영하는 지주회사이다. 공공병원 관리를 총괄하고 있으며, 산하에 공공병원을 소유하고 있다. MOHH는 환자마다 하나의 전자진료기록(Electronic Medical Records, EMR)을 갖도록 하고, 이를 모든 의료기관이 공유하도록 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벨기에의 '포괄적 의료 정보 파일'(Global Medical File, GMF)도 이전이 용이하다. 의학적·사회적·행정적 환자 정보의 활용과 접근도를 높임으로써 1차 의료의 질(Quality)을 최적화 시키고,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진료, 모순된 처방 등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9년 만들었다. 환자 동의하에 한 명의 개원의가 해당 환자의 GMF를 보유하며, 환자를 담당하는 다른 의사와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개원의는 환자에게 GMF 관리에 대한 비용을 정보관리료로 받는다. 환자는 의사에게 지불한 정보관리료를 질병장애보험공단(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Disability Insurance, NIHDI)으로부터 모두 상환 받는다. 또한 환자는 본인의 GMF를 관리하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 본인 부담금의 30%를 감면받는다. 환자의 정보를 한 군데에서 관리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
대만의 위생복리부는 의료이용에 대한 효율적 관리를 구축하기 위해 'Health Cloud'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중앙건강보험은 환자의 과거 의료기록을 의사와 약사가 확인할 수 있는 'NHI Pharma Cloud System'과 '의료비용 심사(감사)'를 온라인상에서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들을 통합한 'Electronic Medical Record' 등의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제도는 시민을 선거 득표를 위한 의료 포퓰리즘의 대상에서 미래 의료제도의 혁신자로 탈바꿈 시키는 단초이다. 이를 통해 미래 의료제도에 획기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세계는 지금 'patient citizen(환자시민)'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