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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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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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황건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황건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며칠 전 30년 근속 기념패를 받았다. 

투명한 수지에 30년 근속이라고 빨간색으로 새겨진 기념패를 받고 자리로 돌아오려는데 4년차 전공의가 파란 수국이 든 꽃다발을 들고 단상 앞으로 달려 나왔다. 내년 2월이면 정년이니 이 꽃다발을 준비한 전공의들은 나의 마지막 제자들인 셈이다.

참 오랜만에 제자들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코로나 사태로 못 갔던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는 이도 있었다. 유럽에서 가볼만한 곳을 알려달라기에 나는 벨기에의 '앤트워프'을 추천했다. 그곳엔 루벤스가 살던 집이 미술관이 돼 그의 작품이 많다는 점을 일러줬다. 옆자리의 손빠른 제자들은 고기를 구우면서도 이동전화 인터넷으로 벌써 루벤스의 동상을 찾아냈다.

내가 퀴즈를 냈다. 

"그 동상에서 루벤스의 상징물은 무엇인가?" 

언뜻 답을 찾지 못한 제자들이 힌트를 달라고 했다. 

"관세음보살이 잡고 있는 물건들과 같다."

그러자 그들은 바로 검색해 정병과 꽃(우담바라)를 찾고서는 루벤스의 동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를 발견한 2년차가 "여기 발치에 방패같이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1년차가 "팔레트입니다"라고 정답을 맞췄다. 

화가에게 팔레트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는 걸 간파한 그에게는 식사 후 아이스크림이 상품으로 주어졌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가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30년 뒤 자네들은 어떻게 되고 싶으며, 자신을 상징할 '엠블럼(emblem)'은 무엇일까?" 

대답은 연차별로 우선권이 있었다.

연예인처럼 외모가 출중하며 수련 중에도 유튜브에 출연하는 4년차는 "저는 의사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상징은 '혀(tongue)로 하렵니다."

"자네는 사마천의 '소진, 장의 열전'을 읽어보게."

겨울에도 윈드서핑을 즐기며 우람한 가슴근육을 자랑하는 3년차는 "저처럼 우락부락한 의사도 미적감각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성형외과의사가 되겠습니다. 저의 상징은 수술칼 입니다."
 
"자네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같은 몸을 지녔으니 충분히 가능하네."

아직까지 혼자 집도는 못해 '메스'를 잡아보지 못한 2년차는 "저는 봉합에는 자신 있습니다. 지침기(needle holder)가 저의 상징입니다." 

저년차 성형외과 전공의로서 가장 성실한 모범답안을 말해준 그에게 이튿날 나는 내가 저술한 책에 사인과 함께 지침기를 그려줬다.

학생시절부터 의료봉사를 다니던 1년차는 "저는 동남아 낙후된 지역에 의과대학을 세우는 것이 꿈입니다."

"꼭 그리 되어 거기서 학장으로 활동하기를 바라네…."

중국 유학생으로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는 의사는 "제 이름을 딴 성형외과병원 체인을 세우는 것이 희망입니다."

30년 뒤에는 내가 94세가 되니 이들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볼 가능성은 낮지만 이 젊은 의사들의 이상을 들으니 내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때 수석전공의가 물었다.

"교수님의 상징물은 무엇입니까?"

관세음보살이 정병과 꽃을 든 것(持物)을 보고 바로 "교수님은 30년간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물으며 나의 허를 찌른 것이다.

전문의 수료 후 1년만에 대학병원으로 와서 지내온 3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굳이 업적을 말하라면 성형외과에 필요한 해부학 연구로 논문 몇 편 쓴 것과 '과학기술훈장'을 받은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어 차라리 입을 닫았다. 

미국 교육자 헨리 반다이크(Henry Van Dyke)의 시 '무명교사예찬'이 생각났다.

 

그는 스스로의 학문하는 즐거움을 젊은이에게 전해주며 
최고의 정신적 보물을 젊은이와 함께 나눈다
그가 켜는 수많은 촛불들 
그 빛은 후일에 그에게 되돌아와 그를 기쁘게 하노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받은 최고의 보상이로다

 

이제 몇달 뒤면 나는 학교를 떠나지만 나의 제자들의 가슴에 큰 이상이 있으니 이들이 이상을 이루는 날 나를 기억해 준다면 그것은 내가 받는 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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