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의대 교수(중앙대병원 이비인후과)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읽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다짐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도 순수한 삶을 살고자 했던 시인의 마음은 '서시'를 통해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이 시처럼 겸손하지만 의연하게 살라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부끄럼을 잊은 건지 부끄럼을 모르는 건지 부끄럼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덧 내로남불이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 분위기는 하늘에서 윤동주 시인이 통탄하고 있을 것 같다.
보건복지부가 2022년 7월 26일부터 한의사의 해외 진출 시 필요한 면허증, 졸업장 등에 표기되는 한의사 영문 명칭을 'Oriental Medical Doctor'에서 'Doctor of Korean Medicine'으로 변경한 일이 있었다. 한의사들은 이런 영문 명칭 변경의 의미를 한국 한의학만이 갖는 우수한 특장점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K-MEDI'가 세계로 펼쳐지고 올바로 인식시킬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필자는 아무리 봐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의사들은 '전통의학'이라고 하면서 예로부터 치료한 방법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국민 건강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왜 전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가까운 중국이나 베트남 등은 자신의 전통 의학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traditional chinese medicine'나 'vietnam traditional medicine'과 같이 'traditional'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들처럼 자신의 학문에 자부심을 가진다면 공식 명칭에 'Traditional'을 써야 하고, 오히려 보건복지부에서 'Doctor of Korean Medicine'으로 쓰라고 해도 'Traditional Medical Doctor'라는 명칭을 고수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의사들은 'Traditional'을 버렸고, 이는 한의사들이 주장하는 한의학만이 갖는 우수한 특장점과 전문성을 보여줄 게 없어서 이름만 살짝 바꿔 실제로는 의사와 한의사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름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대한한의사협회는 한의사 영문 명칭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살펴야 할 의료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한 수준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미 법적으로도 끝난 문제"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의료법에 정해져 있는 의료행위는 '이미 법적으로 끝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대한한의사협회는 의사의 의료행위를 한의사가 할 수 있게 허용해 줄 것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의료법에서 정한 면허 행위의 범위를 한의사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해 사법부의 최종 판결을 무시하고, 한의사도 의사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의료기기를 쓰려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의사들은 초음파 같은 영상검사나 CBC 같은 혈액검사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의과대학 6년과 인턴, 전공의 과정 5년 총 11년을 배우고 있다. 한의사들이 연수교육을 이수한 뒤 이런 검사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살펴야 할 의료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의사가 침술에 대한 연수교육을 받고 환자에게 침을 놓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건강한 사회는 전문가가 전문가의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질 때 가능하다. 한의사는 'Traditional Medical Doctor'를 사용하고, 예로부터 내려온 방법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그 나름대로의 국민 건강 증진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한의학이 마치 현대의학이고 근거중심의학인 것처럼 말하지 말고,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인 논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의사들도 필수의료와 일차의료 중심 지역완결형 커뮤니티 케어 같은 정책들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의 직역을 존중하고 각자의 역할에 매진하는 의료 시스템을 국민은 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