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만 6건이다. 현 정부는 디지털 플랫폼 정부 구상을 발표하면서 국민체감 선도 프로젝트에 이를 포함시키는 등 팔을 걷고 나서 이번에 정말 국회 문턱을 넘는 건 아닌가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다. 13년째 제자리 걸음이었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 얘기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의 골자는 보험계약자·피보험자 등이 요청할 경우 병의원 등 요양기관이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기존의 종이서류를 대신해 전자적 형태로 보험회사에 전송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해당 업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전문중계기관)에 위탁하자는 것이다.
실손보험 가입자수가 올 3월 3977만명으로, 국민건강보험 가입자의 77%에 달해 제2의 건강보험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정작 청구 절차가 까다롭다 보니 소액 보험금은 청구하지 않는다는 논의에서 촉발돼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실손보험 청구 절차 간소화를 권고했고, 이후 매 국회 회기마다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이를 추진하는 가장 큰 취지는 보험가입자의 청구를 간소화해 편익을 증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8년 보험연구원이 펴낸 '실손의료보험금 미청구 실태 및 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실손의료보험을 청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꼽는 이유 중 현재 이야기되고 있는 "청구의 번거로움(5.4%)"은 극소수였다. 대부분(90.6%)은 "금액이 소액이어서 청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보험업계와 일부 언론은 '소비자의 편익'이라는 명분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의료계가 발목을 잡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며 의료계 탓을 하고 있다. '소비자 편의'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작은 편익을 얻는 대신 이를 위해 개인의 의료정보를 보험회사에 전자적 형태로 넘기면서 파생될 보다 근원적 문제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환자진료 정보가 디지털화돼 보험사에 넘어가면 가장 민감한 개인의 건강정보가 유출될 위험성이 있으며, 가뜩이나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기 위해 소송을 남발하고 있는 보험회사들은 축적된 개인 의료정보를 토대로 쉽사리 보험 가입을 제한하거나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는 식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
의료계의 지적대로, 청구내용을 전송하면 적은 보험금은 쉽게 받을 수 있겠지만 환자의 병원별, 의사별 진료내역이 DB화돼 이를 보험금 지급 거절에 활용할 경우 정작 큰 질병에 걸렸을 때를 대비한 실손보험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더욱이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곳이 의료계만이 아니다. 그동안 이 법안은 소비자의 편익을 내세우다보니 소비자단체들이 이 법안을 모두 찬성하는 것 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참여연대 같은 곳은 편리함의 이면을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대선때 이재명 대선후보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추진 공약을 냈을 때 참여연대는 "개인의 의료정보가 디지털화되면 신용정보, 통신정보 등과 결합해 개인이 특정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그렇게 된다면 개인의 민감 정보가 목적 외로 사용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추후 환자 보험금 지급 거절이나 보험료 인상, 환자의 가족력과 같은 개인정보를 이용한 보험 가입 거절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며 의료계의 입장과 맥락을 같이 했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 인지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정의당 배진교 의원이 지난 5월 돌연 보험금 청구 업무를 위탁받은 심사평가원이 병원으로부터 받은 문서를 보험사에 비전자문서로 보내도록 하면서 개인 의료정보 유출 우려가 없는 실손보험 간소화법을 발의했다고 하나 이 역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보험가입자와 보험회사 간의 사적 계약관계인 실손보험 청구대행에 공적기관인 심사평가원이 관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문제다.
찬성론자들은 궁극적으론 보험소비자인 국민의 편익이 증진되니 이것 역시 공익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강변하겠지만 그 외피 속에 감춰진 개인의 의료정보를 활용해 보험료 지급거절이나 위험도가 높은 보험가입자의 가입 거절 등 감춰진 이면을 보험소비자들이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