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조사 후 오류 투성이 수진자 진료내역 근거로 72일간 업무정지처분
5천명에 이르는 진료내역 중 부당·이중·거짓청구 아닌 것도 상당수 포함
법원 "현지조사 시 사실확인서 서명했어도 오류 있다면 행정처분 위법"
보건복지부가 부당청구 등을 하지 않았는데도, 현지조사 후 수 천 명에 대한 진료내용을 부당청구 등의 근거로 제시하면서 요양기관에 대해 72일이라는 업무정지처분을 내리는 등 횡포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법원은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요양기관에 대해 부당·이중·거칫청구 등을 이유로 현지조사를 실시하고 원장으로부터 직접 사실 확인서에 서명까지 받았으나, 수진자들의 진료내용이 부당청구 등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해 사실 확인서 서명을 이유로 요양기관 업무정지처분을 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실제로 5000명에 이르는 수진자들의 진료기록 중 부당·이중·거짓청구에 해당하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 포함됐기 때문에 요양기관 원장이 사실 확인서에 서명을 했더라도 보건복지부의 업무정지처분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서울에서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A의사는 2015년 12월 경, 2016년 7월 경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요양급여비용 청구 현황 등에 대해 현지조사를 받았다.(2013년 6∼2015년 11월까지, 2016년 3월∼2016년 5월까지 총 33개월)
현지조사 결과 약 5000명의 수진자의 진료내역에 대한 부당한 청구 사실이 적발됐고, 부당금액은 6700여만으로 산정됐다.
현지조사에 따르면 A의사는 ▲본인부담금 과다징수(제1처분사유/5740여만원) ▲진찰료 산정기준 위반청구(제2처분사유/180여만원) ▲비급여대상 진료 후 요양급여비용 이중청구(제3처분사유/660여만원) ▲내원일수 거짓청구(제4처분사유/100여만원) ▲건강검진 후 요양급여비용 이중청구(제5처분사유/100여만원)를 했다.
A의사는 현지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위반사실을 자인하는 내용의 '사실 확인서'에 서명했다. 이를 근거로 보건복지부는 2018년 7월 13일 A의사가 운영하는 내과의원에 대해 72일간 업무정지처분을 했다.
그러나 A의사는 업무정지처분이 부당하다며 서울행정법원에 업무정지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행정처분의 근거가 되는 부당청구 등의 진료내역이 오류가 많아 처분이 잘못됐다며 지난 8월 25일 A의사의 손을 들어줬다.
A의사는 제1처분사유와 관련 "원고가 수액제(삐콤펙사주, 타론주, 알타질주, 코티소루주, 휴온스텍사메타손디나트륨) 등을 수진자들로부터 비급여로 비용을 지급받았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여러 수진자들에게 수액제를 비급여로 투여한 사실이 없고, 비급여 비용을 받은 사실 자체도 없으며, 일부 수진자들에게는 타론주를 투여한 뒤 그 비용을 요양급여 처리했다"며 "모든 수진자들로부터 비급여 비용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제3처분사유와 관련해서는 "원고가 675건 상당의 비급여대상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 그에 따른 진찰을 했을 뿐, 별개 질병에 대한 진찰을 하지 않았음에도 진찰료를 요양급여비용으로 청구했다고 하는데, 대다수 수진자들에게 예방접종 자체를 하지 않았고, 혹여나 비급여대상인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 별개로 요양급여대상 질병에 대한 진찰을 했다면 진찰료를 요양급여비용으로 지급받을 수 있다"고 행정처분의 부당함을 강조했다.
제5처분사유와 관련해서는 "원고가 건강검진을 받은 수진자들에 대해 건보공단에 검진비용을 청구했음에도 검진비용을 요양급여비용으로 이중청구했다고 하는데, 여러 수진자들에 대해 검진비용을 이중청구한 사실도 없다"고도 했다.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현지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사실 확인서의 증명력 인정 여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재판부는 "현지조사 과정에서 A의사가 직접 자필로 사실 확인서에 서명하고 날인한 사실, 그리고 사실 확인서에는 각 처분사유에 해당하는 수진자들의 명단이 각각 첨부돼 있는 사실 등은 인정된다"고 보면서 "확인서의 증거가치를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그러나 "이 사건 사실 확인서는 내용의 미비로 인해 각 처분사유에 대한 증명자료로 삼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의사가 확인서의 내용을 정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자필로 서명하고 날인했다고 보기 어렵고 ▲각 처분사유에 해당하는 수진자들의 수는 무려 5000여명에 이르고 ▲각 처분사유와 같은 행위는 현지조사가 이뤄진 때로부터 최소 2개월에서 최대 3년 이전에 이뤄졌으므로 A의사가 각 처분사유와 같은 행위를 각 수진자별로 정확히 기억하고 확인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다.
또 ▲A의사가 확인서에 자필로 서명하고 날인하기에 앞서 5000여명에 이르는 각 수진자별로 각 처분사유를 면밀히 검토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부여됐다고 볼만한 사정을 발견할 수 없고 ▲건보공단은 각 수진자들에 대한 개별 진료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확인서에 각 처분사유에 관한 내용을 부동문자로 기재했고, 그 결과 확인서에는 각 수진자별로 사실과 다른 내용이 상당수 포함돼 확인서가 각 수진자별로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정확하게 작성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따라서 "사실 확인서만으로는 각 처분사유가 모두 충분히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행정처분이 재량권을 일탐·남용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제1처분사유에 해당하는 1만 188건 모두가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자·가입자 및 피부양자에게 요양급여비용을 부담하게 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고, 삐콤헥사주 및 수액제를 단순한 피로 또는 권태의 해소를 위해 수진다들에게 투약한 경우도 포함돼 있다"고 봤다.
또 "제3처분사유 중 일부는 수진자들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독립적인 요양급여대상 진료행위를 하고, 그에 따른 요양급여비용을 청구한 내역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어 총 675건 모두가 속임수 등으로 요양급여비용을 부담하게 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행정처분은 수진자들이 비급여대상인 예방접종을 했음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수진자들이 예방접종을 한 사실 자체가 없다면 제3처분사유는 인정될 수 없고, 이 부분 처분사유에 부합하는 증거로 사실 확인서를 증명자료로 삼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밖에 "제5처분사유와 관련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A의사가 내과의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수진자들 중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수진자들에 대한 검진비용을 이중으로 청구했음을 인정할 증거도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건보공단이 제3처분사유와 제5처분사유를 이유로 A의사가 건보공단을 기망해 요양급여비용을 편취했다는 이유로 사기죄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두 건에 대해 '혐의없음' 불기소처분을 한 사실도 고려했다.
재판부는 "제1, 3, 5처분사유 중 원고가 인정하는 일부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처분사유 상당수가 인정되지 않음에도 수진자별 개별 검토나 조사 없이 일부 인정된 부당청구와 관련된 키워드를 입력해 산출된 명단을 부당청구로 간주한 현지조사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부당청구금액을 특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봤다.
그러면서 "제1, 3, 5처분사유는 전체적으로 위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고, A의사가 다투지 않고 있는 제2, 4처분사유만을 기초로 월평균 부당금액, 부당비율을 다시 계산하면, 이 사건 처분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며 행정처분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한편, 이번 원고 측 소송을 맡은 이아 변호사(브라이튼 법률사무소)는 "현지조사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현지조사 직원이 의사로부터 징수하는 확인서를 기초로 의사가 부당청구 사실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었고, 법원에서 의무기록 등을 기초로 해 확인서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실질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이 눈여겨볼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지조사 과정에서 담당 직원이 법정에서 다투면 된다고 하면서 확인서에 서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반드시 확인서에 서명할 필요는 없고 이후 서명한 확인서가 소송 과정에서 생각치 못하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