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 대상 수상작 '아빠의 파도'

제12회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 대상 수상작 '아빠의 파도'

  • 장만평 충남의대 의예과 1학년 pyung0819@naver.com
  • 승인 2022.10.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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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 주최·한국의사수필가협회 12회째 주관...젊은 의학도 인문학적 소양 고양
서울시의사회·대한개원의협의회·대한의학회·한국여자의사회·박언휘슈바이쳐나눔재단 후원

<span class='searchWord'>유형준</span> 심사위원장은
유형준 심사위원장은 "올해 제12회 의학도 수필 공모전 대상으로 선정된 '아빠의 파도'는 심사위원 전원이 최고점수를 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면서 "'아빠의 파도'는 습(濕)하되 음습(陰濕)하지 않다. 이 모든 핍진한 서사를 흠잡기 어려운 문장력으로 이끌고 있다. 남다른 감각과 진정성을 갖춘 작가의 만발을 기대한다"고 평했다. [사진=pixabay] ⓒ의협신문

'아, 파도가 높아지나 보다.' 

불안한 확신이 주는 불쾌감이 심장을 움켜쥐는 바람에 잠이 달아나버렸다. 눈을 잔뜩 찡그린 채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새벽 여섯 시다. 잠을 깨운 불안함은 방문 틈을 뚫고 들어온 아빠의 목소리 때문이다. 나름 소리를 낮춰보려 하지만 '밀물' 시기 아빠의 목소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휴대폰으로 아빠의 블로그를 검색해 들어갔다. 밤새 포스팅을 스물세 개나 올렸다. 어제도 거의 잠을 자질 않은 것이 분명하다. 거실로 나오니 아빠는 벌써 외출 채비를 마친 상태다. 

"아침부터 어디 가려고요?"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내 목소리는 퉁명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들뜬 표정이다.

"어! 며칠 어디 좀 갔다 오려고." 

그리고 이내 바리바리 싼 가방과 함께 현관을 나선다. 아빠의 기분은 가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오듯 높아진다. 나는 이것을 '밀물'이라고 부른다. 

아빠에겐 조울이 있다. 조울증, 이제 양극성 장애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주기적으로 아빠의 기분에 너울을 만든다. 밀물의 아빠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느 날엔 만물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듯, 자유를 갈망하는 초인이 된다. 세상의 모든 억압과 통제, 정부와 특권층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도 한다. 들뜬 기분만큼이나 목소리의 톤과 세기는 몇 단계 올라가고, 식당, 카페, 술집, 마사지샵… 동네의 모든 가게를 찾아다니며 지갑을 연다. 온종일 사람들과 연락하고 만나며 자주 술에 취한다. 위태롭게 너울거리는 파도는 가끔 범람해버리기도 했다. 

세상을 바꿀 프로젝트를 기획하겠다며 가족도 모르게 사무실을 얻어 온갖 물건들을 사들인 적도 있고, 도로를 막은 택시기사에 화가 난 나머지 택시의 본네트를 막대기로 내려친 일로 경찰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직장에선 까탈스러운 상사들과 종종 언성을 높이며 싸우곤 했다. 

엄마와 누나들은 그런 일들의 뒷수습을 하러 다녔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었으며, 아빠를 붙들곤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애걸했다. 나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폭풍우가 잠잠해지길 기도하다가, 차라리 아빠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이 높아질 때마다 가족들은 깊이 잠겨 가라앉았다. 나는 그 질식감이 싫어서 당신의 해안가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공부할 것이 많다는 핑계로 애써 아빠의 파도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졸업 후엔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정신질환자를 마주하기도 했다. 어떤 직원들은 신도 제대로 신기지 않은 채 그들을 끌고 갔고, 소리 지르며 말문을 막아버렸으며, 저런 사람들은 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혀를 찼다. 그들의 가족마저 그들을 경멸하듯 증언했다. 

그때마다 난 당신을 떠올렸다. 들어주는 이도 안아주는 이도 없이 부서져 내렸을 당신의 컴컴한 세월을 생각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빠가 당신 입으로 당신의 인생이 망했다고 얘기했던 날이. 그제야 나는 파도가 오랫동안 당신을 침식시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마침내 스스로 무너졌음을 고백하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약을 꾸준히 먹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사실 당신이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십 수 년의 파도는 이미 나를 당신으로부터 너무도 아득한 곳으로 밀어내어 버린 것만 같았다. 파도 앞의 나는 여전히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여섯 살 소년이었다.

이번 밀물이 허벅지쯤 차올랐을 때, 여느 때처럼 뒷걸음치려다 잠시 멈칫했다. 이제 파도가 나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 나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경찰을 퇴직했다. 그리고 수능을 다시 봐 의대 신입생이 되었다. 안정을 뒤로하고 꿈을 찾아 나선다는 멋진 청년의 모습은 파도의 거품처럼 스러진다. 아빠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내게 정말로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치료해 줄 자질이나 있을까. 고개를 돌려버린 사이 켜켜이 쌓여온 파도는 의구심과 죄책감의 해일이 되어 나를 덮친다.

'아빠의 파도'엔 우울한 습기(濕氣)가 가득하다. 그러나 너울을 회피하고 방관하던 의구심과 자책감은 어떠한 거센 파도도 넉넉히 받아줄 바다로 바뀌고 있고, 여섯 살이었던 소년은 아픈 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의사를 꿈꾸는 의대생이 되어 그 바다의 꿈을 적바림하고 있다. (<span class='searchWord'>유형준</span> 심사위원장 심사평 중에서). [사진=pixabay] ⓒ의협신문
'아빠의 파도'엔 우울한 습기(濕氣)가 가득하다. 그러나 너울을 회피하고 방관하던 의구심과 자책감은 어떠한 거센 파도도 넉넉히 받아줄 바다로 바뀌고 있고, 여섯 살이었던 소년은 아픈 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의사를 꿈꾸는 의대생이 되어 그 바다의 꿈을 적바림하고 있다. (유형준 심사위원장 심사평 중에서). [사진=pixabay] ⓒ의협신문

아침부터 어디론가 떠났던 아빠에게서 저녁에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지, 아무 일 없이 전화할 사이가 아닌데- 잠시 주저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잔뜩 취한 목소리다. 왜 또 술을 마시고 그래요- 답답해하며 입을 열려던 찰나, 아빠가 말했다. 

"내가 미안하다. 너한텐…. 참 많이 미안해."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이내 눈에 물결이 차올랐다. 

"너는 지금까지 항상 열심히 해왔고, 아빠인 내가 그걸 도와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 미안해." 

"나… 잘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아빠." 

"무슨 소리냐, 아빠는 젊었을 때 법이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너는 둘 다 해내고 있지 않니. 얼마나 잘 해왔어." 

"아니, 아빠한테 말이야. 아빠한테 잘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안돼서… 미안해."

장만평(충남의대 의예과 1학년). ⓒ의협신문
장만평(충남의대 의예과 1학년). ⓒ의협신문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고, 더는 서로의 미안함을 묻지 않았다. 

"아마…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나는 괜찮다."

그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당신의 파도를 정말로 받아들이기까지. 당신의 물결이 알약 몇 알로 잠잠해지는 파동이 아니라, 고해(苦海) 속 처절한 몸부림이란 걸 이해하기까지. 파도가 할퀴어 남긴 무수한 삶의 생채기를 알아주기까지. 그리하여 내가 또 다른 누군가의 파도를 감싸 안아줄 바다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의 해안가에 서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을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홀로 밀려오다가 거품이 되곤 했을 그 외로운 일을 바라보다 보면, 어쩌면 파도의 시간 너머 당신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떠밀려간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나는 바다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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