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중에 소설 '돈키호테'(1605)의 배경이 되는 '라 만차' 평야에 속하는 '푸에르토 라피세(Puerto Lapice)' 마을에 들렀다. 돈키호테가 세비야로 가는 비스케지방 귀부인을 베네딕트 수도사 두 명으로부터 구출한 것이 바로 이 마을 근처이기에 작가 미겔 세르반테스의 집필실을 재현한 박물관이 여기에 있었다.
이곳에는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1450년경)한지 약 150년 이후에 스페인을 넘어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돈키호테 초간본의 금속 활판이 전시돼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집필실을 재현해 놓았으며, 한 노인이 내복바람으로 칼을 치켜 들고 있는 인쇄된 종이로 피복한 조각상이 있었는데, 이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 책을 하도 많이 읽다 보니 자신이 기사가 되었다고 착각한 하급귀족(hidalgo) 노인을 표현한 것이었다. 실제로 총포류의 발달로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생각하던 기사(중갑기병)은 이미 16세기 중반에 모두 사라졌으므로, 세르반테스가 이 소설을 집필하던 16세기 말에는 '기사'란 오직 친목단체로만 남아 있었다.
소설 속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탐독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스스로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세상에 정의를 내리고 불의를 타파하며 약자를 돕겠다는 원대한 꿈을 세우고 실현하기 위해 모험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출정에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 갇히고 소달구지에 실린 채 집으로 돌아오며 '돈키호테 전편'이 끝난다.
전편이 출판되고 10년뒤(1615년), 돈키호테가 한 달간 집에서 요양하다가 세 번째로 집을 나서는 내용으로 속편이 나왔다. 전편을 읽었기에 세상 사람이 그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공작 부부와 주변 사람들이 그를 놀린다.
삼손 카라스코 학사는 그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려고 추적한다. 그는 결국 '하얀 달의 기사'로 분장한 삼손 카라스코에게 패해 기사로서의 모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꿈을 잃은 자로서 우울증에 빠진 상태로 죽는다. 그의 시종이었던 산초는 임종을 앞둔 돈키호테에게 어서 일어나 기사로서의 모험을 찾아 다시 나가자며 오열한다. 속편은 현실 앞에서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숙소에서 문득 1960년에 출간됐지만 재작년에야 한글로 번역된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에세이집이 생각났다. 정년이 몇 달 남지 않은 나는 두 인물 중 어느 편에 가깝게 살아 왔나 생각해 보았다.
성형외과 의사로서 대학병원에 근무한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좋은 의사'로 만들기 위해 의학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십 년이 조금 넘었다. '환자, 의사, 사회' 과목에서 '문학과 의학'을 시작한 지는 10여년이 됐다.
한국의사수필가협회의 회장을 지낸 강사와 함께 의사가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학생들이 읽은 다음 독후감을 쓰고 토의하는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의 호응도 좋았고 이를 논문으로 완성하여 해당 학회와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목은 시험으로 학점을 매기는 대신 합격/불합격만 판정하기에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참여도가 급격히 줄었다.
전공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는 미리 강의 자료를 제출해야 하기에 학생들은 그 자료를 갖고 있으며, 수년 간의 기출문제들을 확보하고 있는 학생들은 굳이 수업에 몰두할 필요도, 출석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대면수업으로 강의실에 들어가도 빈자리가 수두룩했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면 문자로 연락받은 학생들이 우루루 뒷문으로 들어와서는 손을 들고 "아무개 왔는데요" 했다. 출석을 다 부르고 강의를 시작하면 슬그머니 뒷문으로 나가버리는 학생들도 있었고, 내게 집중하지 않고 펴 놓은 아이패드만 바라보는 학생이 있어 그 쪽으로 다가가 들여다보면 다른 과목을 보고 있는 순간도 눈에 띄었다. 이게 바로 코로나 직전이었다.
학생들의 태도에 적잖이 놀란 나는 의학교육을 전담하는 그 과목담당교수에게 전화로 하소연했다. 그가 나를 위로했다.
"이제 아셨습니까? 저는 진작부터 느꼈습니다. 따라오는 친구들도 있으니 그들이 고맙지요…."
그의 말을 듣고 올해 나의 교수로서의 마지막 강의까지 완수했다.
스페인 여행이 끝나고 귀국하니 읽지 않은 이메일이 있었다. 정년 이후에도 '문학과 의학' 강의를 계속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같이 수업을 맡았던 선생에게 연락했다.
나의 거취가 정해지면 이어가자고, 내가 참여할 할 수 없는 경우엔 혼자라도 이어가 달라고.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으니 '좋은 의사' 만들기를 그칠 수는 없지 않냐고.
그 여의사는 답장 대신 프로이트가 약혼녀에게 '돈키호테'에 대해 쓴 편지의 일부를 보내왔다.
"이상주의자이면서 이상을 비웃는 한 위대한 사람의 모습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고 꿈에 사로잡히고 가장 간단한 사실을 잘못 해석하고 평범한 것을 고귀하고 진지한 것으로 변모시키며 그런 뒤에 처량한 꼴이 되는 고결한 기사였지요."
의과대학생들을 좋은 의사를 만들려는 노력은 이어져야 한다. 현실 앞에서 꿈을 접을 수는 없다. 나 또한 꿈을 잃지 않은 교수로서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