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주최·한국의사수필가협회 12회째 주관...동상(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상)
후원 서울시의사회·대한개원의협의회·대한의학회·한국여자의사회·박언휘슈바이쳐나눔재단
두려움에 직면하는 순간들이 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들은 대개 일시적이지만, 우리는 간혹 극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해부학은 의대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상징적인 수업 중 하나이다.
시신을 마주하여 인체를 탐구한다는 사실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상케 하며 일종의 두려움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나는 걱정 반 떨림 반의 심정을 안고 해부학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막상 해부를 본격적으로 진행해보니 이는 단지 기우였음을 알게 됐다.
해부 중인 하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를 천으로 덮어 두어 카데바가 실제 사람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해부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상지와 등 가슴 부위의 해부에 접어들었다. 등 쪽 해부를 마치고 가슴 부위의 해부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등 해부가 끝난 우리는 가슴 해부를 위해 시신을 앞으로 뒤집어야 했다.
머리를 덮은 천을 걷어내고 뒤집는 순간 - 나는 시신과 눈이 마주쳤다. 이전까지는 시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쳐다볼 일이 없었기에 그렇게 마주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생기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눈.
나는 말 못 할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학기 시작 전 내가 우려했던 종류의 것이 아닌,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시신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이나 거부감 따위의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이질감이었다.
조원들 뒤로 물러나 마음속에 좀 전의 장면을 그려봤다. 회한이 담긴 듯한 두 눈에서는 더 이상 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고는 이내 이해했다. 지금은 카데바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한 때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넓은 세상을 뛰어다녔던 발은 굳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연인과 맞잡은 채 따뜻한 사랑으로 채워졌던 두 손은 식어버려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일생을 살며 바라본 모든 것을 담아왔던 눈에는 이제 공허함만이 남아있다.
우리가 손에 든 살점, 근막은 단순한 적출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일생에 거친 소산이자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단순히 표본으로 놓여 있다. 카데바와 조원의 모습 간의 대조가 극명하여,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면 저와 같은 모습이 될 터이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육신만이 남게 될 터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생은 너무나도 허무하지 않을까. 해부학을 진행하며 느낀 진정한 두려움은 시신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죽음을 막연한 관념이 아닌, 현실로 인식하는 데서 기인했다. 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실습이 끝났다. 의문은 사라지지 않은 채 집까지 따라왔다. 저녁때가 되었으나 식욕도 없고, 공부를 하려 책상에 앉아도 집중을 할 수 없다. 단지, 무기력함에 휩싸인다. 허무함이 빚어낸 불꽃이 모든 의욕을 불태운 듯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해본다. 삶은 정말 허무한가.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방 안의 공기가 참을 수 없이 답답하다. 방을 나서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4월의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쓸고 간다.
길가에 난 자그마한 풀이 몸집의 몇 배나 되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져 실루엣만이 희미하게 남는다. 저 멀리 낡은 건물들 사이로 해가 기울어간다. 하늘을 물들이는 낙조는 은은한 잔향을 남기는 듯하다. 보는 이를 빠져들게 하는 그 향기를 좇다보니, 알 수 없는 고양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순간의 감각에만 집중해본다. 시원한 바람, 아름다운 하늘, 한적한 거리가 만들어내는 협화음에 전율이 일고, 문득, 깨달음이 나를 스친다.
나는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 속에는 감동이 있다. 태양은 하루의 끝에서 반드시 저물어가지만, 그것은 결코 허무를 의미하진 않는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저릿해진다. 마음속, 의욕을 불태우는 줄로만 알았던 불꽃이 여전히 격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불꽃은 더 이상 허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떠올린다. 삶은 유한하다. 그러기에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설령,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한들 그것은 인간을 굴복시킬 수 없다.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고 감동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정경을 보며 감탄하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단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유한하면 어떤가. 유한한 것이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하기에 삶은 가치가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은 결국 권태를 불러일으킨다. 역설적으로, 끝이 있기에 과정에 집중할 수 있다. 삶의 끝이 주는 허무함은 현재에 집중하자는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앞의 일에 집중하고, 매 순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된다. 사소해 보일지라도,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결국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허무함을 양분으로 삼아 정진할 수 있다. 마음속에 피어나는 허무의 불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만큼 사납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듯이.
생각을 거두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내딛는 발에 점차 힘이 실린다. 저녁 어스름의 시원한 공기를 마주하며, 식사 메뉴에 대한 기분 좋은 고민을 시작한다. 길가에는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프리지아가 산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