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헌혈 운동 앞장 선 의사·성악가 '박성태 고문' 

인터뷰 헌혈 운동 앞장 선 의사·성악가 '박성태 고문' 

  • 송성철 기자 medicalnews@hanmail.net
  • 승인 2022.12.0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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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상 헌정회 원로위원장 "헌혈 운동 선구자" 헌정대상 후보 추천
1977년 '헌혈의 노래' 초연·헌혈 권장 자선 독창회 일곱 번 열기도
12대 국회 의료인 처벌 완화법 개정 주도...행정관청 전횡 막아야

1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성태 의협 고문. ⓒ의협신문
1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성태 의협 고문. ⓒ의협신문

12대 국회의원(1985년 5월 13일∼1988년 5월 29일)을 역임한 소인(韶仁) 박성태 대한의사협회 고문이 제2회 대한민국 헌정대상 후보로 추천됐다. 

추천인은 목요상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 목 의장은 추천서를 통해 "박성태 원로위원은 헌혈 자선 독창회를 일곱 번 개최하면서 헌혈운동에 앞장선 의사·성악가"라면서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에 무료진료 활동과 재해대책기금 모금에 앞장선 도규계(刀圭界) 외과의사"라고 소개했다.

박성태 의협 고문(84세)은 의료계는 물론 음악계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한국음악협회 명예이사장과 국제음악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평생 의사의 길을 걸어왔지만 한국성악회 고문을 맡을 정도로 '음악'은 잊지 못하는 마음 속 연인이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선친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매혹됐습니다. 자연스레 음악과 함께 성장했지요."

마산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클래식 레코드 음악감상회를 결성, 우리 가곡 부르기 활동을 벌였다. 가곡 '고향의 노래'와 동요 '둥글게 둥글게' 등을 만든 마산고 동창 이수인 가곡·동요 작곡가와의 만남은 음악인으로 향하는 전환점이 됐다.

"1971년 국군진해통합병원 외과장으로 복무할 당시 베트남 전쟁 부상병들이 속속 후송됐습니다. 혈액이 모자라 수술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지요."

불현듯 음악회를 열어 헌혈을 홍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즐겨 듣고 부르던 이탈리아 오페라와 우리 가곡을 가려 뽑아 '헌혈 권장을 위한 자선 독창회'를 열었다. 1971년 11월 진해에서 막을 올린 공연은 해군통제부·진해시·마산시·조선일보사·경향신문사·마산문화방송·KBS마산방송이 후원사로 나서면서 네 차례나 더 열렸다. 

"당시만 해도 피를 사고 파는 매혈(賣血)이 성행할 정도로 헌혈에 관한 인식이 거의 없었죠. 독창회에 참석한 500여명의 시민이 팔을 걷었습니다."

전국 군 병원에서 1년 동안 수술할 수 있는 혈액이 모였다. 국방부는 이듬해 헌혈 공로상을 수여했다.

1970년대 한국헌혈협회(초대 이사장 김기홍·우석대병원장)를 중심으로 헌혈 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정부도 헌혈협회의 계몽운동에 부응, 1970년 8월 혈액관리법을 제정했지만 매혈 풍토는 여전했다.

박 고문은 헌혈을 권장하기 위해 모두 일곱 번의 독창회를 열었다. 1977년 5월 3일 류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대한혈액관리협회 주최 헌혈 권장 독창회에서 이화여고 합창단과 함께 국내에서 처음으로 '헌혈의 노래(작곡 이수인/작사 주문돈)'를 선보였다. 당시 보건사회부 헌혈홍보자문위원으로 활동한 박 고문은 '헌혈의 노래' 공연을 계기로 '헌혈운동의 선구자'란 별칭을 얻었다. 

의사이자 성악가인 박성태 원장은 헌혈 권장·재해기금 모금·지체장애인 지원 등을 위해 일곱 차례 자선 독창회를 열었다. 사진은 1983년 5월 20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헌혈 권장 자선 독창회. 반주는 정진우 서울대 음대 교수가 맡았다.  ⓒ의협신문
의사이자 성악가인 박성태 원장은 헌혈 권장·재해기금 모금·지체장애인 지원 등을 위해 일곱 차례 자선 독창회를 열었다. 사진은 1983년 5월 20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헌혈 권장 자선 독창회. 반주는 정진우 서울대 음대 교수가 맡았다. ⓒ의협신문

12대 국회에 입성해서는 '민정당 재해대책기금 모금 음악회'를 열어 매년 거액을 모아 기탁했다. 서울대동창회 사업이사로 활동하면서 '지체장애인을 위한 음악회'를 통해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전했다. 노태우 대통령 주치의를 맡기도 했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와 국제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필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인 박 고문은 1993년 제18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음악을 통한 나눔과 문학계에서의 왕성한 활동으로 동아의료문화상·문화예술공로상·서울의대 함춘대상 사회봉사상·21세기 한국인상을 받았다.

1982년 12월 30일 펴낸 <span class='searchWord'>수필집</span> [人情의 햇살이 불탈 때](교음사). 박 고문은 수필 '소야곡'으로 1993년 제18회 노산문학상을 받았다. ⓒ의협신문
1982년 12월 30일 펴낸 수필집 [人情의 햇살이 불탈 때](교음사). 박 고문은 수필 '소야곡'으로 1993년 제18회 노산문학상을 받았다. ⓒ의협신문

정계 은퇴 이후에는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에서 진료비지원심사위원장·<憲政>지 편집위원·이사·고문 등을 역임했다. 

2021년 원로회의 위원으로 추대된 박 고문은 최근 의료계가 직면한 현실을 걱정했다.

박 고문은 1986년 12대 국회 의정 활동 당시 의료법 개정을 주도했다. 의료인 면허취소 사유 중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자'를 '국가보안법·형법 및 보건의료관계법령 등에 위반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자'로 수정하고, 의료인의 경미한 법규 위반사항에 대하여 형벌 대신 벌금형으로 바꾸는 법안. 1년여 노력 끝에 1987년 10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수정안이 가결됐다. 

박 고문은 12대 국회의 의료법 개정 취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거꾸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21대 국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전문직업 수행과 관련이 없는 교통사고를 이유로 운전면허가 아닌 전문직 면허를 취소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과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중처벌금지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가공무원은 물론 변호사·변리사 등은 자체 징계위원회를 거치도록해 행정관청의 전횡을 방지하고 있다"고 지적한 박 고문은 "의료직종은 이러한 절차 없이 바로 행정관청의 전단적 권한 행사로 징계하고 있어 공평하지 않다"면서 "헌법이 규정한 형평의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재결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1977년 11월 29일 세계 3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내한했다. 당시 한국성악회 공보이사인 박성태 고문이 파바로티를 영접했다. 파바로티가 박성태 고문의 독창회 공연 팸플릿을 살펴보고 있다. ⓒ의협신문
1977년 11월 29일 세계 3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내한했다. 당시 한국성악회 공보이사인 박성태 고문이 파바로티를 영접했다. 파바로티가 박성태 고문의 독창회 공연 팸플릿을 살펴보고 있다. ⓒ의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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