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 보다 못한 '업무대행계약'…의료계 "하도급 계약 유사"
의료사고·분쟁 발생 시 지자체 지원 전무…오롯이 의사 개인 책임
세금·4대 보험·복지 비용 등 모두 개인 부담…집도 알아서 구해야
'업무대행의사'를 아시나요?
최근 모 지역 보건의료원의 내과 전문의 구인난 상황과 함께 급여 조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언론 보도 요지는 수 억원대 연봉에도 의사가 지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적지 않은 보수 조건에도 왜 지원자가 없을까?
농촌에 위치한 산청군은 지난해 11월부터 보건의료원에 근무할 내과 전문의를 모집하고 있다. 3억 6000만원 연봉을 제시하며 두 차례 내과 전문의 모집 공고를 냈지만 지원자가 없어 3차(1월 2∼25일) 모집을 진행 중이다.
산청군이 공고한 내과 전문의는 지방공무원 신분이 아니라 '업무대행의사'다. '업무대행의사'는 의사 개인 자격으로 의료원과 사업계약 형태인 '업무대행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게다가 혹시 있을지 모를 의료분쟁에 대비해 손해배상보험도 개인이 가입해야 한다. 근무시간 중에는 성격이 다른 진료라도 의료원측이 지정하는 업무도 수용해야 한다.
진료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의료사고와 분쟁에 관한 책임도 업무대행의사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의료사고는 의사의 과오로만 생기는 게 아니라, 의료기관 내 다른 직원, 관리 시스템, 약물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지만 책임은 의사 몫이다. 계약 상 해당 지자체는 대행계약자의 문제에 관해 책임질 의무가 없다.
의료계는 '업무대행' 부분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업무대행계약은 일종의 '하도급 계약'과 유사하다.
우봉식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은 "대한민국 지자체가 건설회사도 아니고 무슨 의사 채용을 '하도급 계약'으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통박했다.
채용 공고에 명시한 '대행업무'는 ▲외래 및 입원환자 진료 등 ▲기타 채용자가 지정하는 업무 ▲일반진료 및 건강상담 등이다. 내용만으로도 적어도 2명 이상이 필요한 업무량이다.
산청군 보건의료원 측은 "주말·휴일·야간 근무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공모를 보고 연락을 취한 B 내과 전문의는 "내과 외래진료 하루 80여명에 초음파검사와 응급실 진료, 다른 과 외래 환자까지 커버하는 조건을 안내 받았다"고 전했다.
산청군 보건의료원은 내시경 장비를 갖추고 있다. 내시경 검사와 검진까지 맡을 가능성이 높다.
보수 조건인 3억 6000만원도 허울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개인이 부담하거나 책임져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개인사업자는 사업소득이 3억원을 넘으면 세금 40%(주민세 별도)를 부담해야 하고, 공무원 신분이 아닌 개인 자격이기 때문에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4대 보험료도 모두 감당해야 한다. 또 의료원측이 요구하는 손해배상보험료와 주택비 등까지 더하면 비용이 60%에 이른다는 분석이다. 연봉 3억 6000만원이 실제로는 월급여 1500만원에도 못미친다는 것.
세금과 각종 비용 부담은 물론 의료사고 위험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정신적 부담, 주거 문제, 생활 여건 등을 고려하면 선뜻 지원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같은 상황은 산청군 보건의료원 뿐만 이나라 전국 지방의료원을 비롯한 공공의료기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울릉군 보건의료원은 지난해 내과 전문의 채용 공고를 8차례나 냈지만 결국 채용은 이뤄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5차 공고에서는 '야간 및 휴일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 협조를 요청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경비는 월 경비에 포함된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야간이나 휴일에도 진료할 수 있으며, 진료하더라도 책정된 보수 이외의 수당이나 비용은 지불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당시 울릉군 보건의료원이 내건 조건은 월급여 2500만원.
일부 언론에서는 '전국 15곳 보건의료원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의료계는 급여 수준을 앞세운 자극적인 접근을 경계하고 있다. 국민 정서상 높은 급여 수준에도 일할 의사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봉식 의료정책연구소장은 "업무대행 계약은 근로계약이 아니라 일종의 노예계약이다. 공공기관인 지방의료원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공무원 직업 윤리에는 맞는지, 의사인권 문제는 없는지 촘촘하게 살펴야 한다"라면서 "이번 상황은 쉽게 말하다면 3억 6000만원 줄테니 산청군 보건의료원 내에 내과를 개원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헬조선 의사하도급 계약 실태"라고 비판했다.
"말할 때 마다 바뀌는 근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다"
처음엔 하루 80명 외래진료만...내시경·초음파·응급실·다른 과 진료까지
'업무대행자' 처음 들어…채용자 지정하는 업무 수행해야
인터뷰 - 산청군 보건의료원 내과 전문의 공모 포기 의사
▲보건의료원 측에서 제시한 근무 조건은 어땠나?
산청군 보건의료원 내과 전문의 채용 공고를 접하고 여러 차례 의료원측과 통화를 했다. 급여 조건은 3억 6000만원(세전)이며, 주 5일 오전 9시∼오후 6시 근무로 주 40시간을 제시했다. 진료 상황은 의료원에 하루 150여명의 환자가 방문하는 데 그 중 내과 환자는 80명 정도라고 했다. 의료원에 내시경과 초음파 장비가 있어서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전문의를 선호하는 데 일반 내과의사도 지원받고 있다고 했고, 저는 초음파만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조건은 좋았다. 왜냐하면 하루에 외래 환자 80명만 진료하고 응급실과 병동 근무 없고 주말·야간 근무도 없다고 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원을 결심했는 데 왜 공모하지 않았나?
공모에 지원할 결심을 하고 의료원에 다시 연락했다. 이전 통화에서 제시한 내용으로 근로계약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의료원 측에서 제시한 대로 주말·야간 진료 없고 외래만 근무하는 내용을 근로계약서에 명시해 달라고 했다. 답변은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응급실 진료를 추가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처음 얘기와 달랐지만 응급실 진료는 한 번에 몇 명 정도 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도 답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외래 진료 중에 응급실 진료를 하려면 응급실에 머물러야 하니까 외래진료를 중단해 달라고 얘기했다.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하루 80명 정도 외래진료를 하면서 응급실을 수시로 왔다갔다 하라고 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돌아온 답은 하루 80명을 진료하면서 충분히 응급실 진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다른 데로 환자를 보내겠지만 그런 상황은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했다. 난감했지만 그것까지 받아들였다. 외래진료를 하면서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응급실에 가서 진료하되, 야간·주말 근무는 안 하는 걸로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근로계약서는 썼나?
그제서야 준비된 근로계약서가 없다고 했다. 산청군 조례에 따라 업무계약을 해야 하니 조례를 참고하라는 얘기였다. 직접 '산청군 지역 보건의료사업 업무 대행에 관한 조례'를 찾아보니 어디에도 근무시간·형태 등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백지상태였다. 조례에 관련 내용이 없으면 '없다'라고 쓰면 되지 않냐고 했는 데 그것도 안 써주겠다고 했다.
▲'업무대행의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나?
황당했다. 별다른 얘기가 없어서 계약직 공무원인줄 알았다. 그런데 제 신분을 '업무대행자'라고 했다. 업무대행자라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조례에도 업무대행자의 신분에 관한 설명이 없다. 다만 조례 6조에 '군수는 지역 보건의료 사업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서 업무 대행자를 지도 감독하고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으며 업무 대행자는 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로 규정돼 있다. 한 마디로 시키는대로 뭐든지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의료원 측에 다시 연락해서 업무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군수가 무슨 일을 시킬지 모르는 데 모든 업무를 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업무를 구체화해 달라는 요구를 계속하자 나중에야 내시경과 초음파 얘기를 꺼냈다.
▲근무 여건이 중요한 데 처음에는 외래와 응급환자 진료에 이어 내시경과 초음파까지 늘었다
맞다. 저는 초음파만 가능해서 초음파 하는 동안에는 외래진료를 중단해 달라고 했다. 의료원측에서는 하루 80명 진료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으니, 외래진료하면서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응급실 상황을 반복했다. 초음파를 몇 명을 하게 될 지 모르고, 이상 소견이 있으면 검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외래진료가 얼마나 지연될 지 모르는 데 이게 말이 되냐라고 물으니 또 똑같은 얘기 뿐이다. 외래진료 대기가 3∼4시간 길어지더라도 중단할 수는 없고, 왔다갔다 하면서 진료를 계속하라고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없었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가 반복되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응급실은 누가 맡고 있는지 물었더니 공중보건의사 7명이 응급실을 전담하는데 올해 4명이 나간다고 했다. 추후 언제 몇 명의 공보의를 배정할 지 확정된 게 없다고 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반드시 내과 진료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내과 외래를 진료하는 중에 다른 과 진료를 끼어넣으면 같이 봐줄 수 있지 않냐며…. 산청군은 고령 환자가 많다. 응급실에는 내과적 문제가 있는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과 진료까지 보라는 것이다. 만약 내시경까지 할 수 있는 의사를 채용하면 하루 80명 정도 외래를 봐야 하고, 내시경과 초음파 검사와 다른 진료과 환자도 봐야 한다. 여기에 응급실에도 왔다갔다 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결국 지원을 포기했나?
올해 공보의 4명이 나가고 3명만 남게 되면 응급실을 24시간 운영하기 힘들다. 주말이나 야간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채용 공고에 명시돼 있지만 채용자가 지시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앞서 언급한 산청군 조례에 따라 군수가 지시하면 따라야 한다. 계약서에 업무를 구체화해서 명시하자고 했지만 못한다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게다가 현재는 입원실을 운영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면 안 한다는 보장도 없다. 신뢰가 깨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위험과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진료할 수 없었다. 지원 결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