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 Endocrine Society 관행 깨고 첫 의사 출신 Chief Medical Officer
연례 컨퍼런스 열어 임상진료지침 개정 작업, 미 의회, FDA에 정책 자문 수행
1916년 창립돼 100년 이상 전통을 이어오는 Endocrine Society는 전 세계 1만 8000명이 넘는 내과 의사들이 가입해 있는 거대 커뮤니티이다. 내분비학의 기초과학 연구 지원, 미래를 주도할 맞춤형 의학에 대한 토론, 글로벌한 협업을 통한 치료약제와 치료모델의 혁신, 신기술의 확대를 통해 건강 격차 개선, 주요한 advocacy들과의 협업을 통한 정책 개선 및 피드백, 매년 이뤄지는 ENDO라는 이름의 내분비학자들의 글로벌한 모임 호스팅 등 여러 일을 하고 있다.
로버트 라쉬(Robert Lash)는 이 커뮤니티에서 의료총책임자(Chief Medical Officer)란 직책을 맡고 있다. Endocrine Society에서 하는 주요한 업무 중 하나는 정책을 만드는 advocacy들에게 정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지금껏 Endocrine Society에서는 비의료인이 이 직책을 맡아왔다. 하지만 의료인의 솔직하고 적극적인 의견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해 로버트 라쉬는 의료인으로는 최초로 이 업무를 담당하게 됐고, Endocrine Society의 핵심 인물로서 전 세계인의 건강 보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긴 코로나19 시국에서 로버트 라쉬는 지금껏 한국의 내과의사들과 온라인 회의만 진행하다 지난해 내한했다.
기자의 모교인 연세의대 이유미 교육 부학장 역시 내분비학 전공으로, Endocrine Society의 Clinical Guideline Committee에서 일하고 있어, 이 부학장의 소개로 라쉬 교수의 짧은 내한 와중에 인터뷰하는 행운을 얻었다. 글로벌한 의사 공동체의 리더로 일하는 라쉬 교수에게 Endocrine Society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는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아울러 의과대학 학생을 위한 조언을 들었다.
Q. 2017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1만 8000명 이상의 내분비학 의사들이 속해 있는 Endocrine Society의 CEO가 되셨고, 지금은 의료총책임자로 있다. 의료총책임자는 어떤 일을 하는 지 말씀 부탁드린다.
조금 부끄럽지만, 지금껏 Endocrine society의 고위 관계자는 의사가 아니었다. 의사인 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의료인으로서는 처음이다. 정부나 국회에서 의료자문을 구하고자 할 때 비의료인에게 구하는 것이 어렵다 판단했고, 그래서인지 의사인 나를 코로나19 초창기에는 CEO로, 현재는 의료총책임자라는 직위를 맡긴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미국 의회, 보건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보건부 산하 보건의료재정청(Center for Medicare & Medicaid Service), 그리고 식품의약국(Food & Drug Administration) 같은 advocacy 그룹이나 보험회사, 혹은 비영리민간단체(non-profit organization:NPO)들이 의료자문을 하면 의료인의 입장에서 솔직하고 객관적인 피드백을 해주고 있다.
또한 전 세계 내분비학 의사들과 협업을 도모한다. 다국적의 내분비내과 의사들이 회의를 진행하며, 국제 가이드라인 개정과 같은 사안들에 대해 의논한다. 연구결과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므로, 이것을 근거로 진료를 할 때 지침이 되는 임상진료지침(clinical guideline)도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정될 가이드라인이 임상연구 결과나 실제 의사들의 경험과 일치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또 매년 한 번씩 우리 Society의 의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ENDO 미팅이 열린다. ENDO 2022는 애틀란트에서 성황리에 진행됐다. 특히 젊은 내분비내과 의사들이 이러한 컨퍼런스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Q. 이런 글로벌 커뮤니티에서 의료총책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어떤 능력이 이러한 업무를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글로벌한 의사들과 협업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와 나라들을 좋아하고 더 알고 싶어 하는 열린 마음인 것 같다. 한국의 의료 환경은 미국과 비슷하게 고도로 발달돼 있어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예컨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그리스와 같은 국가를 방문하게 되면 그곳의 의료시스템은 내가 지금껏 경험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예컨대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내분비내과가 매우 인기 과이고,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에 투자하는 돈은 적은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견 없이 그들의 의료시스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관심을 갖고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열정을 갖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우리가 진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보여주기식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여러 국적의 의사들이 협업하는 것이니 각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다. 한 번은 한국의 낮 시간대(우리의 밤 시간대)에 회의를 진행했다면, 또 한 번은 미국의 낮 시간대에 회의를 진행하고, 이렇게 말이다.
Q. 최근 미국 애틀란타에서 엔도케어스 법(Endocares act)을 시행한다는 기사를 봤다. Endocares는, 한 번도 의사를 만나보지 못하는 등 의료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의료진들이 그 지역으로 찾아가 대대적인 건강검진(health screening)을 시행하고 검진에서 고위험군으로 판정된 환자들을 바로 의사와 연결해주는 봉사로 알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게 전국민의료보험이 보장돼 있지 않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의료체계에서 단발적인 자원봉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데, 이를 극복할 보완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나?
흥미로운 질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번의 단발적인 자원봉사로 끝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Endocares act는, 건강검진을 진행하는 봉사이다 보니 지금껏 본인이 당뇨라던가 갑상샘 기능항진증과 같은 질병을 갖고 있는지, 혹은 당뇨 전단계라거나 고혈압이라는 것을 몰랐던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수 있다. 본인이 질환을 갖고 있거나 고위험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보다 의료시설을 자주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그 지역의 의료시설이 무상으로 혹은 적자를 내더라도 의료취약계층을 치료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이런 의향이 있는 지역에서 Endocares act를 시행하고는 한다. 본인의 건강 상태를 알게 된 의료취약계층 주민들은 지역의 의료시설에서 후속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Q. Endocrine Society의 국제연례회의인 ENDO 2022에 1만 여명이 참가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들었다. 다른 과의 경우도 이렇게 국제적인 미팅이 종종 이뤄지는지, 혹은 내분비내과나 Endocrine Society만의 특징적인 모임인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전문과들은 이러한 Society가 있고 모임을 한다. 다만, 미국심장학회(American Heart Association)과 같은 경우엔 연례 컨퍼런스에 전 세계 심장과 의사들이 모이지만 어디까지나 구성원은 미국의 의사들이다. 우리는 구성원 자체가 글로벌하고, 미국의 의사들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볼 수 있다.
Q. 요즘 뜨거운 주제 중 하나는 디지털 의료 및 앱으로 처방하는 의료서비스이다. 미국에선 이 주제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
미국에서 이 주제가 매우 뜨거운 감자이다. 아마 한국보다도 더할 것이다.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telehealth'라는 단어는 기존에는 핸드폰 앱으로 진단 및 처방을 내리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보다 인터넷 통신 속도가 느리고, 잘 되지 않는 지역이 많다. 그래서 몇몇 주에서는 코로나19 유행 시기 동안은 유선상으로, 즉 전화를 통해 의사와 상담 후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의료보험이 대면 의료 면담과 동일하게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환자의 이동시간을 줄여줘 편하고, 의사도 동일한 진료를 전화상으로 하면서 보험급여 처리되고, 또한 코로나19 환자라면 방역을 위한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더라도 진료를 받을 수 있어 이득인 셈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코로나19 시기 이후에도 이러한 telehealth가 상용화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 법안으로 영구적으로 이런 변화들이 정착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고 있다.
Q. 38년 동안 내분비학 의사를 해오셨다. 예민한 질문일 수도 있어 조심스럽지만, 언제가 가장 힘들다고 느꼈나? 통상적으로 학생 때는 레지던트 때가 가장 힘들고 이후에는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랜 기간 일하면 전문의 중에도 직업 상의 슬럼프가 찾아올 것 같다.
그렇다. 내분비학 의사라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대부분의 의사들이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일만 열심히 하게 되면 환자를 잘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날 보러 더 많은 환자들이 찾아온다. 퇴근시간 이후의 밤에 환자 차트를 작성하게 된다. 점점 연구나 교육에 투자하는 시간, 그리고 나 스스로의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번아웃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진료 시간을 적절히 조정하고 남은 시간엔 개인적인 시간을 잘 보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모든 의사들은 한 번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안정기를 찾을 것이다.
Q. 교수님은 이런 직업상의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나?
나는 외래진료를 보는 시간에 제한을 두고 남는 시간에 다른 일정들의 균형을 맞췄다. 현재의 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현재 일이 있다 보니 더 이상 교수로서 학생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래에 기회가 된다면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다시 병행하고 싶다.
Q. 마지막으로 (학생으로서) 과를 선택할 때 내 적성에 맞는 과와 흥미에 맞는 과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교수님이 내분비학을 선택할 당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보통은 그 두 개가 같이 가는 것 같다. 적성에 맞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돼 잘 하게 된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만약 두 개가 너무 다른 상황이라면 흥미를 따라가라.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결국 잘하게 되는 것은 정말 쉽다. 아마도 본과 3, 4학년 때 병원에서 실습을 돌다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입과 같은 것들은 부수적이다. 한 번 과를 정하고 나면 내가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일을 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 주변 의사들을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과를 고른 사람들은 삶의 만족도가 높다. 일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이나 취미생활 같은 것도 더 잘해내는 것 같다. 결국 다른 것들을 따지기보다는 좋아하는, 하고 싶은 과를 고르는 것이 인생 전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