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학부과정을 마치고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것은 전문가로서 살아가기 위한 교육 과정의 종착점 이였다. 대학병원에서 학문 연구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면허증만으로도 직업적 자유를 지키면서 전문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한 수련과정 속에 100일 당직 정도는 기본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오더도 많았지만 극기훈련과 수련과정으로 미화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정상적인 업무 수행까지 영향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근로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대학병원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전공의 또한 병원별로 협의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초창기 최대의 이슈는 수련생이면서 근로자이기도 한 신분 규정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의 문제였고, 노동권을 보장 받아야 수련권을 지킬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었다.
단체 행동은 노동자로서의 권익이상으로 명분이 중요하다.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의사에 대한 부당한 제도로부터 전문가로서의 권리를 지키는 일은 그 중에서도 중요한 일중의 하나였다. 가장 용감하게 앞장 섰고 스승님과 선배들의 격려도 많았다. 잘못된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자는 역시 가장 낮은 곳에서 희생을 하는 전공의 였기 때문이다.
그와중에 1997년말 서울시보라매병원에서 자가호흡이 없는 환자의 보호자 요청에 따른 자의 퇴원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신경외과 전공의에게 미필적 살인죄를 적용한 검찰의 기소 사건이 일어났다. 생명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의료진에게는 지나친 죄목이었고 의료계 전체가 공분하였다.
전공의들의 문제이기도 하였지만 전문가 사회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전협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서울시 전공의 궐기대회를 마치고 대전협 창립 총회가 이뤄졌다.
대전협 집행부의 임기는 1년이었다. 전공의 문제를 담아내기에도 짧지만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문제를 담아내기는 더욱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사회로 진출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의료사회적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대전협 3기는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권쟁취투쟁의 선봉에 섰고, 그 이후로도 26대 집행부에 이르기 까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전문가의 목소리를 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결국은 대법원까지 가서 실형이 선고 되었지만 연명치료에 대해 자기결정권이 무시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의료현장이 법원의 판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생명윤리와 의료윤리에 대한 전문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의료계의 무수한 노력에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국가의 관료주의적 체계는 심화되고, 제도적 구속은 늘어만 가고, 교과서적 정의는 무시되고, 전문가의 직업적 자유마저도 침해당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가장 자긍심이 강하고 인기가 높았던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는 과도한 제도적 통제와 저수가로 인해서 기피하는 분야가 되어버렸다. 의료현장의 노력은 폄하되고 정부 관료가 의료를 지배하고 책임은 의료계에 전가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인구절벽과 초고령화 사회가 시작되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상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재앙이 될 수 있지만 제도권은 폭탄돌리기를 계속하면서 전문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이 어느때 보다 높아지고 있다.
거대 시스템에서 분업화 되고 부속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건강에 관한 문제는 인간 중심의 포괄적인 접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관료주의에 막혀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만큼 전문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기회는 순간이고 결정은 어렵다고 한 히포크라테스의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전공의는 순간이지만 의사로서의 삶은 길고 대한민국 의료계와 국민 건강의 미래는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