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씨앗들의 합창'

우울한 '씨앗들의 합창'

  •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4.06.28 15:11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한국의사시인회는 22일 저녁 열 두번째 사화집 '씨앗들의 합창'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윤태원 시인, 유담(유형준) 시인, 유성호 교수, 김연종 시인, 홍지헌 시인, 송명숙 시인, 김영탁 주간, 박세영 시인, <span class='searchWord'>한현수</span> 시인.
한국의사시인회는 22일 저녁 열 두번째 사화집 '씨앗들의 합창'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윤태원 시인, 유담 시인, 유성호 교수, 김연종 시인, 홍지헌 시인, 송명숙 시인, 김영탁 주간, 박세영 시인, 한현수 시인.

2024년 봄, 개화 시기가 조금 늦어졌다.

날씨도 우울하고 꽃들도 우울하고 뉴스도 우울하다. 의료 대란이라 하기도 하고 의정 갈등이라 칭하기도 하는, 집단 우울증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단단히 마음을 추수려보지만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 꽃들이 길을 만들지 않고 새들이 둥지를 떠나면 진한 녹음도 푸른 죄수복처럼 무거워진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조금씩 시들어 간다.

2024년 여름, 사화집 발간이 조금 늦어졌다.

야생의 꽃들이 들판 여기저기에 피어 있다. 만나면 반갑고 못 만나도 가슴 설렌다. 하수상한 시절, 가장 잘한 건 언어의 집 한 채 지은 것이다. 시(詩)는 보이지 않던 긴 터널의 시간이었다. 묵언의 시절에 뿌려 놓은 씨앗들의 합창이다.

이른 봄, 황량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무모한 열망을 파종했다. 긴 묵언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한국의사시인회 제12시집 <씨앗들의 합창>이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는 스무 명의 회원들이 참여했고, 마종기 시인과 이원로 시인은 초대시로 시집을 빛내 주었다.

노란 표지의 시집을 펼쳐보니 시집 속 시들도 '시인의 말'도 어느 때보다 무겁기만 하다.

이 봄날, 의료계가 붕괴되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데, 뒷산 정발산에는 어김없이 직박구리와 멧비둘기와 되지빠귀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제비꽃과 조팝나무꽃과 냉이와 꽃다지가 사방천지에 가득하다. -서홍관 시인

폭풍 속에서 삶을 놓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던 생명을 보았다./ 나는/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박언휘 시인

우울한 시절이다. 우울한 처방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우울한 봄날을 통과하려면 과열된 심장에 냉각수를 보충하고 메마른 전두엽에 감성을 수혈해야 한다. 알약의 개수가 자꾸 늘어간다. 햇빛 찬란한 봄의 난간을 조심해야 한다. -김연종 시인

나는 내 좁은 진료실을 사랑한다. 내 삶의 생생한 현장인 이곳은 기쁨과 보람과 감사를 퍼낼 수 있는 옹달샘이다. 그러나 간혹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이 공간 밖으로 날아가고 싶을 때 나는 일상을 비우고 남도의 섬으로 떠난다. -정의홍 시인

나도 병들고 사회도 병들었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이 가장 아프다. -홍지헌 시인

지난 6월 22일, 인사동 조그만 식당에서 출간 모임을 가졌다. 외부 인사 초청도 여흥도 없이 회원들끼리 귓속말하듯 조촐하게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감사패를 전달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울함에 젖어 있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간절함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를 견뎠다.

뒤를 이른 회원들의 자작시 낭송은 여느 때보다 간절했다.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것들/ 볼품없이 척추가 휜 것들/ 하나의 집념만으로 모였다/ 이제는 비틀리고 꼬여도/ 알알이 떨어뜨리며 내려놓는/ 씨앗들의 합창, 좌르르/ 참고 참다 이제는/ 노랗게 흘려 보내도 좋은 씨앗들 (박세영, <씨앗들의 합창> 부분)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위로와 희망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다. 하지만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만의 독법으로 불경스럽게 시를 읽는다.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면 희망의 불빛이 존재할까. 패배 의식과 체념에 사로잡힌 우리는 어떤 희망의 씨앗을 찾아야 하는가. 문학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처럼 어리석은 발상일지도 모른다.

곧이어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의 '서정시를 읽는 순간'이란 문학 강의가 이어졌다. 명강연을 펼쳐주신 유교수는 오는 9월 시행할 마종기문학상의 취지와 진행 상황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릴케의 잠언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타고르의 시편 <저녁의 노래>와 J, 루미의 <4행시 888번>을 통해 서정시의 좌표와 행방을 살펴보았다. 스며드는 아름다움을 처연하게 보여 준 한국의 유고 시인 박서영의 <업어 준다는 것>을 낭송할 땐 잠시 등이 뜨거워졌다.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

무거운 분위기에도 시 낭송을 하고 문학 강의를 듣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한국 문학사에 대한 유성호 교수의 유수 같은 이야기와 의사 문인의 뿌리를 찾는 유담 시인의 정열로 잠시 달아오르기도 했던 여름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자축하는 행사지만, 시 낭송과 문학 강연에 보내는 감탄과 박수조차 조심스러웠다. 현 시국을 바라보며 단톡방에서 격정을 토로하던 회원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지금 사태가 이렇게 위중한데, 우리는 도대체 무얼 하는지?"

행동에 앞장서는 의사도 뒤따르는 의사도 참담한 심정은 비슷할 것이다.

'부디 정부에 바라건대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고 국민과 의사의 편 가르기를 중단하라고.'

도무지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고 우울한 씨앗들의 합창은 여전히 귓가에 윙윙거린다. 3차까지 이어진 거리의 뒤풀이에선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렸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