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묘한 냄새가 느껴졌다. 21세기 들어서는 거의 맡아본 기억이 없는 '용각산' 냄새였다. 어쩐지 정겹지만 구시대 산물로 느껴지는 익숙한 그 냄새를 맡자 '아, 여기가 보령제약 연구소구나'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보령제약의 간판 품목은 '겔포스엠'이지만, 기자에겐 용각산이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70년대 그 유명한 광고 카피 덕택이기도 하지만 한번 맡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묘한 냄새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겔포스도 한 시절을 풍미했던 '광고'의 주인공이었다.
최불암의 수사반장 팀이 고된 수사 업무후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먹는다던 그 겔포스. 지금보다 일반의약품의 비중이 훨씬 높았던 그 시절, 보령제약의 위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04년 현재, 보령제약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보령제약 중앙연구소가 지향하는 R&D의 방향은 크게 신약연구·제네릭개발·일반의약품개발의 세분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몇몇 특별 케이스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대동소이한 방향이다. 즉, 단기적인 매출을 고려하여 제네릭과 일반의약품의 개발에 충실하되, 장기적인 비전을 마련하기 위해 신약개발을 '무리'해서라도 끌고가야 하는 일종의 '딜레마' 속에 보령제약도 엄연히 놓여 있다.
연매출 1,600억원 규모의 중소제약사가 '신약'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단현광 보령제약 중앙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를 보면 안할 수 없다. 물론 경영적인 압박도 많다. 신약개발은 당장 순익이 나는게 아니므로 회사입장에선 주춤하게 된다. 그래도 해야한다. 하다못해 라이센싱인을 하려고 해도 다국적 제약사가 볼 때 신약 안하는 회사는 회사로 보지도 않는다. 상호 라이센싱도 불가능하다."
현재 보령제약 연구소의 최대 기대주는 고혈압치료제인 BR-A-657이다. CCB계열에 비해 소위 '뜨는 계열'인 ARB계열 신약이며, 현재 임상 1상이 끝난 상태로 2008년 시장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전임상을 영국 퀸타일즈에서 진행했다. 보령제약은 CCC계열의 시나롱(일본 UCB로부터 라이센싱인)과 ACE-Inhibitor계열의 카프릴(BMS로부터 라이센싱인)의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다.
순환기분야는 보령제약이 항암제 분야와 함께 주력으로 삼고 있는 분야다. 문제는 현재 ARB계열에는 이미 디오반·아프로벨·코자·아타칸 등의 소위 블록버스터들이 쟁쟁하게 포진돼 있다는 점. 그 틈에서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일단 기존 약물들보다 효능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독성도 적은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블록버스터들과 비교,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부터 연구해오고 있는 기대주로 현재 2상을 앞두고 라이센싱 아웃을 준비중이다. 국내 대기업들도 ARB에 뛰어들었다가 모두 중단했다.CCB에 비해 전망이 좋은 기전인 ARB 신약을 끝까지 끌고 가는 곳은 보령밖에 없다."
또한 생명공학 제품으로 신규면역억제제 Cytotoxic T-Lymphocyte Antigen 4(CTLA 4)-Ig의 연구도 진행중이다. CTLA 4-Ig는 임상적으로 장기이식거부, 자가면역질환 등에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는 물질로 기존 화학적 면역억제제의 부작용을 줄인 효과적인 차세대 생물학적 제제로 기대되고 있다.
이번 취재에서 단현광 소장은 국내업계의 미래에 대한 솔직담백한 진단과 냉철한 비판을 가감없이 쏟아냈다.이는 비단 보령제약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국내 제약업체들 대부분이 가진 딜레마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가 펼쳐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가기 전에 우선 그가 가진 약에 대한 '철학'을 들어보기로 하자.
"약을 연구하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자신의 부모에게, 가족에게 먹인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야 한다. 돈벌려면 다른 사업해야 한다. 사명감이 없으면 안된다."
그는 덧붙인다. "제약은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한다. 일반 소비재와 같이 즉시 투자, 회수되는 물건이 아니다. BT의 경우는 최소 30∼50년 뒤를 봐야한다. 많은 재벌들이 제약에 손을 댔지만 10년을 기다리는 재벌을 못봤다. 모두 소비재 판매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무리수일 수 있는 신약개발', '제네릭', '힛트 일반약'. 이 세 바퀴를 동시에 힘겹게 굴리며 나아가는 국내 10위권 제약사들의 공통된 전략. 이것외엔 정말 없는 것인가.
"일본의 제약산업 발전 모델을 보면, 이 전략이 일단 옳다고 할 수 있다. 일본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방향은 옳다. 그렇다면 거기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문제다. 약효군의 강점에 집중하고 긴 숨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그 차이가 승부를 낼 것이다."
국내 대부분의 제약사들이 택하고 있는 세바퀴 전략이 옳은 것이라면, '제약강대국'이란 꿈은 결국 시간 문제란 말인가? 단 소장은 여기에 한가지 단서를 더 붙였다.
"꿈….힘들다고 본다. 전세계적인 제약사는 차치하고라도, 일본의 10위권 제약사 정도도 힘들다. 앞으로 10년후 한국에 10개의 제약사가 남을지 5개가 남을지 모른다. 이렇게 된데는 국내 제약사들이 쉽게 돈벌 때 재투자하지 않은 이유가 크다."
"합쳐야 한다. 일본도 그랬다. 시너지 효과가 있는 M&A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우리는 두가지 걸림돌이 있다. 기업 소유개념, 그리고 회사들의 특징 부재. 합쳐도 시너지효과가 없다면 소용없다. 이 두가지 장애물을 제거하고, WIN-WIN의 M&A 전략으로 가지 않으면 힘들다. 이 모든 것을 긴 숨으로 봐야 한다."
한두 곳의 재벌 제약사를 제외하고는 국내 5위권이든 10위권이든 연구소의 분위기는 대동소이하다.비전도 전략도 처한 태생적 배경도 큰 차이가 없다.무엇보다 각각의 연구소장들이 제시하는 방향 또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하지만 단 소장 말대로 향후 10년 후 5개의 제약사가 남을지 어떨지 모르는 현재의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제약사들이 공통적으로 세바퀴 전략을 가져가는 동안, 거기에 M&A 전략을 더한 네바퀴 짜리 제약사들이 탄생한다면, 이들이 어떤 면으로든지 비교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또한 다국적제약사들의 시장점유율이 당장 낮아질 아무런 전망도 없다.
그 어느 제약사보다 기업 소유개념 분명하고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한 보령제약.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회사는 살아남아야 한다.과연 보령제약의 R&D 수장은 특유의 공격적인 마인드, 날카로운 통찰력과 추진력을 이용, '올드'하다는 회사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보령제약을 5개 혹은 10개의 생존 가능 제약사 반열에 당당히 올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단 소장과의 두시간에 걸친 열띤 대화를 마치고 연구소를 나왔다. 아직 햇볕이 뜨거웠다. 다시 한번 용각산 향기를 맡아보고 싶어 코를 킁킁거려 봤다.바람은 불었지만 보령제약 연구소 앞마당에는 더이상 용각산 냄새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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