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루시아 수녀
유루시아 수녀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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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미국으로 공부하기 위해 떠났으나 종교에 귀의해 늘 낮은 곳을 찾아 이웃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온 유루시아 수녀.그로부터 45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7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행려환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봉사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다.의료선교를 위해 검은 대륙에서 20년을 보냈지만 한번도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은 유 수녀의 모습에서 '성자가 된 청소부'처럼 수녀님의 삶 자체가 '종교'라는 생각을 들었다.16년전 쯤인가 아프리카에서 한국에 잠시 들은 유 루시아수녀를 취재한 기억을 되살리며, 서울 가양동의 메리놀 수녀회에서 수녀님을 만났다.
 
유 루시아 수녀는 55년 수도여자의과대학(고려의대 전신)를 졸업하고 59년 산부인과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독실한 불교 집안출신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한 때 소설가를 꿈꾸던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1년반 동안 몸을 담았던 일신기독병원의 닥터 매킨지.유 수녀는 닥터 매킨지를 '나의 나침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이후 삶에 큰 동기로 작용한다.

호주 태생인 닥터 매킨지는 일신기독병원의 설립자로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한국땅에 남아 의료시혜를 베푼 인물.한국인에 대한 진실된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선교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었다.또 미국에서 지원하는 병원마다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기묘한 인연을 갖게 된다.유수녀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밀워키 위스콘신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64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일신기독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을 맡았으며, 65년 필리핀에서 마침내 메리놀 수녀회 소속 수녀가 된다.

"아버님의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어요.자식들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까지 했고, 미국에서 돌아오면 개원할 병원 자리까지 봐놓셨는데.부모님에게는 불효를 한 셈이지요.더욱이 불교집안에서 수녀가 나왔으니."
88년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결국 아버님과는 화해를 못하고 말았지만 그때부터 집안식구들과는 화해했고, 식구들도 유수녀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

수녀가 된 그녀는 69년 뉴욕의 머시수녀로 부터 아프리카 의료선교를 제의하는 편지를 받았고, '가장 필요한 것을 주자는 생각'으로 케냐에어? 20년간 의료봉사활동이 시작된다.1960년에야 영국에서 독립한 케냐에는 당시 의과대학이 한 곳으로 1년에 배출되는 의사수는 고작 20여명에 불과했다.의사들이라고는 대부분 영국출신의 외국의사들로 의료혜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출산 때 더러운 칼로 탯줄을 잘라 파상풍으로 신생아들이 희생되는등 조금만 의료혜택이 베풀어져도 살 수 있는 환자들이었다.

"제의를 받았을 때 좋기도 했지만 솔직히 겁도 나고, 불안한 마음도 있었어요.하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겼습니다."
20여년간 케냐의 오지 키난코에서의 봉사활동은 최근 출판된 <케냐의 어머니 유루시아 수녀(해누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지난 96년 <마마웨뚜 가지 마세요>라는 제목으로 냈다가 절판된 책을 살려냈고, 직접 영문으로 적은 내용을 새로 실어 모두 504쪽의 두툼한 한·영 합본판이 됐다. 이 책은 미국 메리놀수녀회 본부로 보내져 수녀 지원자들을 위한 교재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유수녀의 삶 자체가 의료선교활동의 살아 있는 교과서인 셈이다.

하느님의 소명을 받들어 아프리카에 몸을 던졌지만 유 루시아 수녀에게도 그곳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후회는 없다.하지만 다시 안하겠다.예수님이 함께 한다면 하겠다"는 그녀의 말은 그동안의 그녀가 겪은 고난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한다.
'의료·선교'라는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들어갔지만 유수녀는 원주민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전도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곳 사람들은 순진하고 착합니다.자연과 가깝게 살면서 하느님을 잘 압니다.내가 처음 받은 아이가 불행하게도 죽었죠.하지만 그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위로했습니다.'하느님의 책 속에 이름이 적혀 있으면 데려간다'는 것이었죠.이처럼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죠.다만 내게 치료를 받고 나아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면 나 대신 하느님에게 감사하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죠."
유 루시아 수녀는 케냐의 원주민들이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가깝다고 믿고 있다.케냐의 경우 아랍 영향으로 회교도가 많은 곳이지만 그곳에서 한번도 종교 갈등을 느끼지는 않았단다.

유 수녀는 생명을 구해준 신생아를 8년 후 다시 만났던 때를 케냐에서 겪은 가장 감동적인 일로 회상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며 자동차로 9시간이 걸리는 곳에서 아들을 데리고 어머니가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다. 이와 같은 기쁨과 감동이 아프리카에서의 힘든 생활을 이기는 원동력이 됐지만 우기와 건기를 반복하는 아프리카의 날씨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했다.또 일부다처제로 한 남자에 4~5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풍습 때문에 여성의 생명에 대해선 소원한 편인 것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제왕절개로 수혈이 필요한데도 남편이 수혈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했다.

20년간의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마친 유수녀는 이후 4년 동안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선교교육에 나섰다.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3년간 요셉의원에서 행려환자 등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봉사의 손을 내밀었다.그러던 중 96년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에서의 의료활동을 위해 중국에 건너간다.그러나 중국정부가 약속한 병원 개원이 차질을 빚으면서 유 수녀는 길림성의과대학, 공과대학 등의 중국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유 수녀 자신도 1년간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메리놀 수녀회는 어디를 가든 현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우선적이기 때문이다.중국에서의 7년은 갑자기 찾아온 폐렴 때문에 접어야 했고,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일주일에 3번(수목금) 요셉의원에서 행려환자, 노숙자, 알코올중독자, 외국인 진료에 전념하고 있으며, 남은 시간은 서울 가양동 메리놀 수녀원에 기거하면서 수녀 지원자를 지도하고 있다.

의료선교를 위해 찾아간 아프리카에서 유 수녀는 정작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친절을 보면서 하느님을 알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유수녀가 일신기독병원장 매킨지의 선행을 지켜보면서 점차 하느님을 알게 된 동기가 그런 믿음을 가능케 했으리라.마지막으로 유 수녀에게 수녀님과 같은 길을 택하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주문했다.
"종교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는 곳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그리고 종교가 있는 사람은 자기 하느님을 가져가서는 안됩니다."

짧은 당부였다.하지만 세계 곧곧에서 현재진행형인 종교전쟁, 아니 굳이 종교를 들지 않더라도 내 것과 남의 것을 가르고, 또는 내 것이 옳다고 고집하면서 곳곳에서 치루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겪고 있는 현 시대에 긴 여운이 남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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