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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 힘즌 이들 곁에 항상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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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덕 kmatimes@kma.org
  • 승인 2005.01.2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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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수녀회 유 루시아 수녀

'글을 쓰고 싶다'는 고등학교 3학년 소녀의 마음을 바꾼 것은 당시 담임선생님의 말 한마디였다. "의대에 진학해서도, 의사가 되어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글은 쓸 수 있다는 것." 당시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의대를 선택했고, 이는 지난 50여년을 의사로서, 수녀로서, 선교사로서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도 공부에만 몰두했고, 1등을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유 루시아 수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에서의 인턴 수련 시절, 닥터 헬렌 맥킨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유 루시아 수녀는 닥터 헬렌 맥킨지를 주저 없이 '인생의 나침판'이라 말하며, 호주 선교사의 딸로서 부산에 일신기독병원을 차려 당시 힘들었던 한국 여성들을 돌봐줬던 장본인이라고 소개했다. "6.25 당시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지. 한국 여성들을 정성껏 돌보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선교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일신기독병원에서 1년 반 동안 지내면서 이런 다짐은 더욱 확고해졌다.

유 루시아 수녀는 그 후 산부인과 레지던트 수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이 모퉁이, 저 모퉁이로 당신을 이끈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겠냐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미국에 있을 당시 메리놀수녀회의 머시 수녀님한테 편지가 왔어. 케냐 정부하고 독일주교회에서 돈을 모아서 케냐에 병원을 짓는데 의사 한 명, 간호사 세 명이 필요하다고. 갈 마음이 있냐고. 머시 수녀님도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거든. 암암리에 내가 받은 은혜는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 이런 생각에 머시수녀의 제의에 선뜻 '네, 가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했지만 20대의 젊은 여자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려웠지. 케냐로 떠나기 일주일 전에는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거든. 그게 보통일인가?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해."라고 단호히 말하는 70대 노파의 눈에서 처음 케냐를 떠나는 20대의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난 길은 20년간 계속됐고, 현재 '케냐의 어머니'는 그이의 대표적인 수식어가 되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그곳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참담했다. "처음 갔을 때 문화차이도 나고, 모르는 것도 있고, 많이 배웠지. 대부분이 영양실조, 폐병, 설사병, 나병 등 이른바 후진국 병이었어. 6.25를 지낸 사람들은 내 말을 알거야. 또한 소아의 사망률이 50%거든. 즉 금년에 100명을 낳으면 5년 후엔 50명만 살아있는 거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루 300명의 환자들을 돌봐야 했고, 수술이 있는 화?목요일에는 하루 종일 수술 방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전기도 없고, 물도 없고, 먹을거리도 넉넉지 않은 그곳에서 유 루시아 수녀는 20년을 한국 의사로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사막이나 케냐의 오지만을 돌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곳에서 가장 힘든 점은 정서적인 차이였단다. "케냐 사람들은 정신불구자들을 하늘에서 벌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치료를 못 받게 하거든. 그 마을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 내 말은 듣지도 않아. 그래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설득하도록 했지. 마을 공동체 사람들 중에 몇 명을 뽑아 트레이닝을 시켜 가정방문을 시키고 마을에 쉼터도 마련해 사람들을 오게 만들었지. 경제적으로 허락된다면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아이들이 얼마나 컸는지…. 트레이닝 시킨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거든."  

이 짧은 글에서 힘들었던 그이의 20년 세월을 일일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그이 또한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만큼 그들의 생활이 궁금하고, 죽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땅이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어찌 보면 케냐는 유 루시아 수녀의 또 하나의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고, 그곳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그렇다. 갑자기 유 루시아 수녀가 그 곳을 떠난 이유가 궁금해졌다.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할 때였지.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에 출전한 케냐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었거든. 가장 큰 이유는 내 뿌리를 찾고 싶어서였고." 11세 때부터 공부를 위해 혼자 객지 생활을 했다던 그이는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레지던트는 미국에서, 그리고 의료선교를 위해 케냐에서 보낸 20년…. 그러는 동안 우리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고.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놀수녀회의 규율에 따라 3년 동안 미국으로 선교 교육을 떠났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는 서울 영등포의 요셉병원에서 3년 반 동안 노숙자, 행려자,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을 돌봤다. 그 뒤 또 중국으로 건너가 그 곳 의과대학에서 의학영어를 가르치다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지는 이제 1년 남짓. "요즘은 '영웅시대'며, '대장금'을 재미있게 보고 있어.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같은 영화를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앞으로도 뿌리를 찾기 위해, 우리나라를 알아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지."

 

중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유 루시아 수녀는 메리놀수녀회의 웃어른으로서 수녀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을 봐줘야 하고 수, 목, 금요일은 요셉의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등 바쁘게 지내고 있다. 요셉의원은 1987년 8월에 문을 열었으며 순수하게 노숙자, 행려자, 알코올 의존증 환자, 외국인 근로자들의 무료진료를 해주고 있는 곳이다. "사회적 현상의 희생자들이 이 곳을 찾지. 세계화로 수입개방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잖아. 그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 물론 세계화가 좋은 점도 가져왔지만, 그들의 가정을 빼앗고, 갈 곳을 잃었잖아. 가장 안타까운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이야. 재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일순간에 무너지거든."

오랜 만에 찾아온 우리나라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 루시아 수녀의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같이 봉사하는 젊은 의사들을 보면 대견한 생각을 한다고. "머리에 무스 바르고, 귀 뚫고 해도, 참 착해. 어려운 사람들을 씻겨주기도 하고, 밥도 먹여주고…. 그런 거 잘하거든. 앞으로도 그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할 거야."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순간 지금까지 남을 위해 너무 바쁘게만 살아온 유 루시아 수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말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할 일이 하나있지. 그거겠지. 앞으로도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어." 단, '하느님과 함께'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참,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내 은인인 닥터 헬렌 맥킨지가 지금 호주에 있거든. 90살이 넘었는데, 살아계시는 동안 한 번 찾아가서 내 인생을 바꾼 그분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이제 더 이상 유 루시아 수녀에게 '케냐의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간 너무 많은 언론에서 그이를 주목했고, 그이 또한 이를 부담스러워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부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만으로는 그 수많은 세월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글_김순겸(보령제약 사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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