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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태어난 곳 이웃과 함께...인술 45년 '고향 지킴이'

나 태어난 곳 이웃과 함께...인술 45년 '고향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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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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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조영호 원장

· 1914년 충북 영동 황간면 출생
· 1937년 경북의대 졸업

  고향을 지킨다는 것은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생활이라는 조 원장의 설명을 듣고보면 지나온 반생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더구나 조부와 부친이 황간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던 분들이고 보면 그 그늘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삶을 펼쳐보이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 충북 황간면 영창의원 조영호 원장

  황간(黃澗)은 충북 영동군에 속한 면소재지다. 구한국시대에는 황간군이었고, 일제시대만해도 보은·상주 일대의 농산물 집산지로서 일본인이 60호 정도나 거주할 정도로 번영을 누리던 곳이다. 추풍령 밑에 위치, 지역적으로 벽지에 속하면서도 한때나마 그러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경부선 열차가 이곳에 정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로의 발달과 더불어 행정중심이 영동으로 옮겨지고, 농산물 집산지로서의 의미도 상실되어 버렸다. 그 단적인 예가 아직도 수동식 전화기를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전화망이 뻗어져 잇는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그것은 너무도 고색창연한 모습이어서 답답하기조차 하다.

  이러한 황간의 역사를 지켜오며 살아온 ‘영창의원’의 조영호(曺永鎬) 원장은 1914년 생으로 금년 74세이다. 그러나 연륜에 비해 아직도 정정하기만 한 조 원장은 지금도 황간보건지소장, 철도청 황간주재의무실장, 유도회 황간지부장, 영동군 정자문위원, 황간중·고등학교 육성회장 등을 맡아 젊은이 못지않은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은퇴를 해도 후회없을 나이에 이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은 황간이 고향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고향을 지킨다는 것은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생활이라는 조원장의 설명을 듣고보면 지나온 반생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더구나 조부와 부친이 황간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던 분들이고 보면 그 그늘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삶을 펼쳐보이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앞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조 원장은 1914년 생으로 황간면 소계리에서 태어났다. 전매국에 근무하던 부친의 전근지를 따라다니던 조 원장은 경복고등학교를 8회로 졸업한 후 37년 경북의대(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도립대구의원 외과에서 근무하던 조원장은 42년 황간으로 돌아와 남성리 현 위치에서 개원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직장을 정년퇴직후 고향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던 부친을 돕자는 뜻도 들어있었다.

  사실 조 원장의 일생을 돌아볼 때 부친의 영향은 지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 원장의 부친은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쓴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자신은 물론 자녀들의 진학문제 등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소신을 지킨 것은 자신이나 자녀를 살리기 위해 선조들은 욕보일 수 없다는 투철한 신념때문이었다. 이러한 조 원장의 부친은 해방후 미군정 고문관, 도의원 등을 역임했고 2대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도 있는 분으로서 그가 설립한 황간중학교 교정에는 송덕비가 서 있을 정도로 황간에서는 덕망이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이처럼 고향 발전을 위해 애를 쓰던 부친을 돕자는 뜻에서 비롯된 조 원장의 황간생활은 45년에 이르는 동안 많은 결실을 맺게 되는데 그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2년 황간으로 돌아와 ‘영창의원’을 개원한 조 원장은 그 즉시 공의로 피명되었고, 44년 교통부 촉탁의, 52년 영동군 제2보건진료소장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초대 및 2대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평통자문회의 위원, 황간중·고등학교 육성회장, 황간노인회장, 군정자문위원, 황간개발위원장 등을 맡아 지역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지난 해에 그만 둔 영동군의사회장은 초창기부터 약 40여년간을 맡아 회무를 돌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그러한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조 원장이 살아온 지난 반생의 무게와 그 내용이다. 앞서 부친이 황간중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거니와 조원장은 부친의 유업을 이어 이 학교의 육성회장을 맡고 있거니와 본인 스스로 황간고등학교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 황간과 같은 벽지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유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학을 위해서는 외지로 나가야 하고 거기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은 물론 진학을 포기를 해야하는 학생도 많은 실정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조 원장은 발벗고 나서 이 일을 성취했으며 현재는 육성회장을 맡아 장학금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조 원장은 유도회 황간지부장을 맡아 지방문화재 제100호인 ‘황간향교’의 유지 보수에 힘쓰고 있으며, 한천8경의 하나인 월류봉(月留峰)옆에 위치한 ‘한천정사(寒泉精舍)’ 및 ‘송우암유허비(宋尤庵遺虛碑)’등을 관리해 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황간면민회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86년 완공을 보았는데 면단위 지역에 이와 같은 회관이 건립이 된 것은 초유의 일로서 앞으로 도서관 설치 및 각종 문화행사 등이 펼쳐질 계획이다.

  여하튼 고향을 지키며 고향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왔고 현재도 하고 있는 조 원장의 삶을 돌아볼 때 그러한 원동력은 어디서 연유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투철한 신념과 사명감이 있다해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왕성한 활동력 없이는 그러한 일들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조 원장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주저하는 일이 없다. 여타의 일등에서도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시절에는 속시원히 바른 말을 잘해 관계자들을 곤란하게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이 주위의 평판이다. 그만큼 조 원장은 매사에 있어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이나 국민들의 입장에 서왔다는 말이기도 한데 그러한 행동은 병원운영에서도 나타나 돈이 있던 없던 우선 치료를 해주는데서 보람을 찾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돈이 없다고 치료를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다. 따라서 의사라면 지위고하, 경제력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당연히 치료를 해줄 의무가 있다는 조원장의 지론은 요즘 세태에서는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에 비례해 우리의 가슴을 감동케하는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조 원장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모의대 부속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인 장남을 비롯해 모두 장성, 출가 및 분가를 해 영창의원에 붙어 있는 자택에는 현재 부인과 단둘만이 생활하고 있다.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조원장은 여기서 틈틈이 서예를 하기도 하는데 별것이 아니라는 본인의 겸양과는 달리 입상 경력도 있을 정도로 조원장의 실력은 이미 보통 수준이 넘은지 오래다. 자택뒤에 위치한 2백여 그루의 사과나무 과수원을 틈틈이 돌아보는 것도 조 원장에게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낙이다.

  지난 반생이 그러해왔듯 조 원장은 앞으로도 황간을 지킬 계획이다. 74세라는 비교적 적지 않은 연륜을 본인 스스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듯이 조 원장에게서 그러한 세월을 실감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병원을 돌보며 지역사회를 위해 펼치고 있는 그 많은 활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세월 자체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조 원장은 의욕뿐이 아니라 건강면에서도 아직은 혈기왕성하다. 학창시절 유도를 통해 닦은 체력은 지금도 웬만한 젊은이를 상대로 팔씨름을 해도 지지않을 정도이고보면 조 원장의 의욕적인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사족이지만 본지가 이 땅의 의료인 발굴을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닌지도 어언 4년, 그러나 정상적인 의대 출신으로 면단위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를 만난 것은 조 원장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1, 2년이 아닌 45년이란 긴 세월을 오로지 한 장소에서 인술을 펴온 조 원장의 삶에서 남다른 감동을 맛볼 수 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친구들이며 동기들이 학계에서 대도시에서 이름을 떨치고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 때 오로지 황간에 파묻혀 고향 이웃들의 아픔만을 함께 나누며 살아온 조 원장의 마지막 말은 경제와 인술을 동일시 하려는 현금의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그러한 조 원장의 말에서 퍼뜩 떠오른 것은 고향을 지킨다는 것은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생활이라던 좀 전의 설명이었다. 사실 그것은 권리를 주장치 않은 채 헌신적인 봉사로 일생을 살아온 조 원장에게서 능히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실감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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