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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아픈 곳 사회의 곪은 곳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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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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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최의규 원장

·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 1963년 전남의대 졸업

  충남 논산시 고려의원에는 도대체 어떤 원장님이 계시길래 환자들이 이렇듯 신뢰하는 것일까? 하얀 가운을 걸치고 하루종일 환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최의규 원장(61)을 만나보면 그 정답을 금방 찾을 수 있다.




 

  ■ 충남 논산시 고려의원 최의규 원장

  충남 논산시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의원이 하나 있다. 환자들이 너무 많이 문밖까지 줄을 서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예사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은 사시사철 불경기도 없냐고 얘기할 것이다.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겠지만 이곳은 예외다. 항상 기다리는 환자, 진료를 받고 가는 환자들로 북적거린다. 3명의 의사와 11명의 간호사가 바삐 움직여도 바쁘긴 마찬가지. 벌써 1시간 반을 기다렸다는 환자 한 사람에게 기다리는 환자도 많은데 딴 의원으로 가지 않느냐고 묻자 꼭 원장 선생님께 보여야만 한단다.

  충남 논산시 고려의원에는 도대체 어떤 원장님이 계시길래 환자들이 이렇듯 신뢰하는 것일까. 하얀 가운을 걸치고 하루종일 환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최의규 원장을 만나보면 그 정답을 금방 찾을 수 있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있죠. 아프고 병든 이에게는 그 의미 이상으로 정성을 베풀어야 해요. 정상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거죠. 항상 그들의 입장에 서서 마음의 귀를 열고 있으니까 자연히 신뢰감이 생기나 봅니다.”

  최 원장의 이러한 말보다 지금까지 베풀어 온 인술의 행적을 보면 오늘날 그를 찾는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최 원장은 37년 2월생으로 충남 논산이 고향이다. 한의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 2남 3녀 중 막내로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별 어려움없이 어린시절을 보낸 최 원장은 전북 김제 청하 초등학교와 군산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선택할 때 최 원장의 의지는 다부졌다 성실과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며 어떤 환자든 당신의 정성을 다 쏟아놓던 선친의 가르침을 통해 그 맥을 이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됐다. 전남대 의대에 입학하여 63년 2월에 졸업한 최 원장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 졸업후 전주 예수병원에서의 수련의 시절은 최 원장의 앞으로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선교병원인 예수병원은 병원장을 비롯하여 의료진들이 선교사들이었죠. 그들은 환자를 수술하다가 피가 부족하면 자신의 피를 뽑아 환자에게 수혈하곤 했어요.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국, 국적을 떠나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외경시하고 사랑으로 아끼는 그네들의 정신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박봉을 털어 고아와 어려운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정작 자신들은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청년시절 이들의 인도주의적 행동은 최원장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환자들을 대해야 할 지 마음의 지표를 세울 수 있었다. 68년 3월 전주 예수병원 일반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후 최 원장은 월남전쟁에 지원한다. 69년까지 1년 동안 비둘기부대 사령부 의무실장으로 있으면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인명피해는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이런 아픔은 최원장으로 하여금 환자들에게 더욱 혼신을 쏟게 했다.

  6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최 원장은 논산훈련소 육국병원에서 일반외과 과장으로 복무를 마친다. 71년 8월 이곳 논산에 고려의원을 개원했을 때 최 원장의 마음속에는 이미 인술에 대한 집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의원을 개원할 당시는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최 원장은 의료인으로서 어려운 환자를 돕는 것이 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이에 앞장섰다. 새마을 사업 중 부상을 입고 실려온 아주머니를 비롯하여 뇌막염으로 중퇴에 빠져있는 어린이를 무료진료후 완치시켰다.

  이 시절, 최 원장에게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논산에서 명예반장을 맡고 있던 최 원장이 사재를 털어 ‘오손도손’이라는 앨범을 만들어 이웃에게 배포한 일이 그것.

  “그 당시 25세대에 약 125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 마을 만이라도 이웃을 알고 서로 아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웃의 얼굴을 담은 앨범을 제작하게 된거죠. 무척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큰보람을 느꼈어요.”

  지난 80년에는 논산훈련소에 훈련중인 장병들을 위해 난방시설을 지원하고 대천, 서천, 등의 서해안 초소를 찾아다니며 막사에 장판을 깔아주기도 했다.

  이밖에도 최 원장은 수시로 연무대 애육 보육원, 에덴 보육원, 양로원을 찾아 불우어린이나 노인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펼쳐 오고 있다. 논산시내 면단위에서 선발된 소년 소녀 가장 10명에게 매년 쌀과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불쌍한 노인들을 위해 다과를 마련해 향연을 베푸는 일도 최 원장이 자처했다.

  또 한가지. 논산시민들 중 최 원장에게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란다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 장로이기도 한 최 원장은 86년 사비 1,000만원을 들여 부여군 소재 임야 3만여평을 매입, 생활환경이 어려운 이웃에게 묘자리를 무료 분양토록 교회에 희사했다. 묘자리가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최 원장의 봉사는 너무나도 값진 것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전화가 와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최원장이 없는 논산을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최 원장이 논산시에서 맡고 있는 공식 직함은 정말 많다. 고려의원 원장외에 재단법인 전주 예수병원이사장, 논산시의사회장, 강경검찰청 범죄예방위원 협의회장, 강경검찰청 선도장학회이사장 등이다. 그 어느 것 한가지도 열과 성의를 다하는 최 원장이지만 특히 강경검찰청 선도장학회는 나름대로 그 의미가 크다. 93년 청소년 선도와 인재 육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장학회를 선도적으로 조직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 평소에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학자금을 내주는 등 소리없는 선행을 벌여오다가 91년 대전 지방검찰청 강경지청 선도장학회를 조직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최 원장은 굳건한 장학회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사재 1억원을 선뜻 내놓아 93년 6월 재단법인 강경검찰 선도장학회 등기를 필하고, 그해 7월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이사장에 취임했다.

  “청소년들은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꿈나무들이죠. 하지만 가끔씩 어떤 계기로 인해 잘못된 길을 가게되는 경우도 왕왕 있어요. 그들을 잘 이끌고 인도하는 것은 당연히 어른들의 몫이죠. 그래서 어른으로서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선도장학회를 만들게 된거죠.”

  최 원장의 실천으로 인해 여기 저기서 장학금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선도장학회로 인해 기소 유예된 청소년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희망을 얻는 것을 지켜보면서 최 원장은 더 없는 보람을 느낀다.

  논산시 사람들 중 고려의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와 함께 고려의원을 찾아 갈려면 몇시간을 기다려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가다리는 것이 귀찮아 다른 의원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최원장에게 진찰받기를 원한다. 그이유는 단 하나. 최 원장을 신뢰하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논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간 사람중 논산까지 차를 타고 와 최 원장에게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정성으로 대해주는 최 원장인지라 한번 진료를 받은 사람은 다시 고려의원을 찾게 된다.

  “내가족, 내친척이 아파서 찾아왔다 생각하고 진료를 봅니다. 그러면 더 지극정성으로 환자를 돌보게 되죠. 물론 환자들에게는 최고 의료기술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짓됨 없이 환자에게 열과 성의를 다하는거죠.”

  지금가지 26년동안 한 번도 의료사고 없이 지내온 것을 보면 최 원장의 노력이 어느 정도 였는지 짐작이 간다.

  최 원장은 치료 도중 출혈이 심하거나 피가 필요한 위급환자에게는 서슴치 않고 자신의 피를 수혈한다. 한번은 산모가 애기를 낳다 출혈이 너무 심해 생명이 위태로웠다. 최 원장은 수련의 시절, 비록 자신은 조금 어렵게 살더라도 더 불우한 이들을 위해 앞장서던 선교사들을 떠올렸다. 최 원장은 직접 자신의 피를 뽑아 산모에게 수혈하고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 산모와 애기를 살려냈다. 이 일을 계기로 큰 보람을 느낀 최원장은 지금까지도 위급한 환자가 있으면 자신의 피를 직접 수혈하는 일이 많다.

  자신의 이익을 차리기 보다 먼저 타인의 아픔을 토닥거릴 줄 아는 최의규 원장. 따뜻한 진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곪은 곳가지 치료해 줄 수 있는 이 땅의 진정한 의료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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