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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도기행1

시론 인도기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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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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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회 교수(부산의대 산부인과)

지난 2월 두 번 째의 인도 여행을 했다. 이번은 카주라호(Khajuraho)의 그 유명한 성(性)조각들을 사진에 담기 위한 여행이어서 아내와 둘이 만 갔다. 단체여행은 행여 그곳에 들린다 해도 반나절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서울-데리-서울의 항공권은 국내에서 구입하고, 나머지는 인터넷을 통해 그곳의 Jet Tour(e-mail)에 의뢰했었는데 비용도 훨씬 절감되었고,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3일간 카주라호에 머물면서 아내의 도움으로 약 400여장의 슬라이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인구 만 명도 채 안 되는 인도(印度)의 조그만 시골 마을인 카주라호. 대추종려나무의 정원(garden of date palm tree)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 백년 전쯤의 이곳은 정말 대단한 곳이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엄청난 문화유산들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자원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뛰어난 예술가와 석공들이 얼마나 있었기에 이런 엄청난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 세월에 사암(砂巖)들이 좀은 닳았고 여기저기 부러진 부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윤곽이 뚜렷이 남아있는 그 많은 조각의 곡선들이 최고의 예술가가 아니고는 감히 손도 댈 수 없었을 것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기록에는 이런 섹스 조각들이 외벽에 가득한 회교 사원들이 당시에는 85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21개만이 고즈넉이 남아있다. 더구나 이 고을에 쳐들어온 모슬렘과 무갈 제국 군인들이 파괴해버린 것들이야말로 아마 성 조각들의 진수(眞髓)이었을 것인데,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마 상대적으로 그만 못한 것들일 터인데도 그 아름다운 곡선들이 아직 뇌리(腦裏)를 떠나지 않고 있다.

카주라호는 데리(Delhi)에서 남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들 사원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는 챤델라(Chandellas)왕조의 수도이었다. 철도편이 없어서 비행기를 탔는데 타지마할(Taj Mahal)로 유명한 아그라(Agra)에 기착했다가 가는 바람에 약 두 시간 가량이나 걸렸다.

1334년에 이곳을 방문했던 Ibn-Batura라는 사람의 기록은 지금의 카주라호가 거의 황폐해져 있는 것임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고 한다.

왜 하필 이런 색정적인(erotic) 조각들로 성스러운 사원의 외벽을 장식했을까? 마하트마 간디는 "이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경멸했다지만 이건 결코 저주받을 유산이 아니었다. 간디의 시각(視覺)과 관계없이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의 문화유산지로 지정했다. 이 유적은 이미 인도인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 된다.

훗날 빈곤(貧困)이 엄습해 올 줄 알고 마을 후손들이 관광 수입으로라도 호구(糊口)를 하라고 천년전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았을까? 아무리 그때 인도의 힌두교 조각들이 색정적이었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곡선의 유방, 허리 그리고 둔부(臀部)들이었다. 남녀의 엉클어진 교합(交合) 장면들 그리고 또 장면들. 그 몸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사내를 이리 저리 휘어 감고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는 여인들의 모습은 잠시 넋을 잃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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