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증진·질병치료 영역 넘어선 대명제
한의학 현대의료 확장…요원한 의료일원화
◇의료체계 뒤흔든 한건의 판결
2004년 12월 21일, 서울행정법원은 한의사의 방사선사를 통한 CT기기 사용이 면허받은 이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함을 전제로 한 서초구보건소의 업무정치 행정처분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서울행정법원 형사 5부(재판장 김창석)는 "질병에 대한 병상과 병명을 규명·판단하고 이를 치료하는 행위에 있어서는 의학과 한의학이 서로 다른 학문적 기초를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에 앞서 이루어지는 환자의 용태를 관찰하는 진찰의 방법 또는 수단은 의학이나 한의학 모두 인간의 오감을 이용하는 것이어서 여기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한의학에서의 진찰 방법인 망진(望診), 문진(問診), 문진(聞診)을 의학에서의 시진, 문진, 청진과 동일하다고 규정했다.
재판부는 한의사가 CT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망진의 수단 또는 방법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교과과정에서 영상 진단에 필요한 여러 과목을 개설하고 교육하고 있으므로 한의학에서 학문적으로 CT기기를 사용한 진찰을 인정한다고 지적했다.
서울행정법원의 이같은 판결은 한의사에게 현대 의료기기를 이용하도록 함으로써 정확한 진단을 위한 정보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단순한 시각을 넘어 의학과 한의학으로 이원화돼 있는 한국의 의료법과 의료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법원이 그러한 판결을 내리게 된 배경은 한의학과 의학이 인체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한의학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의 경우 실제 인체해부도와 거리가 멀고, 조잡하며 불완전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내경(內徑)의 내장 그림 또한 실제 인체해부학적인 구조와 다르다. 한의학의 오장육부의 개념과 의학의 인체해부학의 개념이 다르고, 질병관이나 기능 또한 의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고 있다. 의학에서는 희(喜) 노(怒) 애(哀) 락(樂) 공(恐) 분(忿) 등의 감정을 뇌의 신호전달체계로 이해하고 있지만 한의학에서는 각 장기가 감정을 주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의학에서 오장육부가 아닌 실제 인체해부학적인 접근과 이론을 새롭게 내놓지 않은 상황에서 현대 진단의료기기를 사용하겠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의학계의 중론이다.
재판부는 "양의학에서 개발된 기술이라 하더라도 한의사에 의한 이용을 금지하여야 할 합리적인 사유를 발견하기 어렵다"며 한의사의 CT 사용이 한방의료행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린 배경을 설명했다.
질병관과 인체해부학적인 접근이 다른 상황에서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으로 인한 적절치 못한 처방과 치료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 의학계가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의학과 한의학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이원적 의료체계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했는지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잘못된 첫 단추로 의학발전 역행
1951년 9월, 6·25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간 제2대 국회는 의사와 한의사를 구분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전시동원령에 따라 모든 의사가 전선에 배치된 까닭에 단 한 명의 의료인력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후방 국민 의료를 담당할 목적으로 한의사 제도를 부활시킨 것이다.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으로 만들어진 이원적 의료체계는 의학과 한의학간의 교류를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의학발전을 저해하는 악결과를 낳고 말았다. 의료제도의 이원화로 인해 한국 사회는 ▲의료 이용 혼란 ▲의료자원 낭비 ▲국민 의료비 증가 ▲국가 의료 수준 하락 ▲약물 부작용 증가 ▲의료 및 의료인에 대한 이미지 실추 ▲국가 경쟁력 하락 ▲의료인력 공급 과잉 등 갖가지 부작용과 폐해를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의료정책과 의료제도를 기획하고 추진할 때도 한방 의료정책과 의료제도를 다시 짜야 하는 정책의 낭비와 비효율을 거듭하고 있고, 사회문화적으로도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시장개방과 국제화 시대 속에 한의학은 세계무대로 이어지는 통로를 스스로 차단한 채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중의학에서 전래된 한의학이 지난 수백년 동안 경험의학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진보와 발전을 위해 얼만큼 노력을 경주해 왔는지에 자성할 필요가 있다. 한의계도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한의학이 세계 속에 통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현대의학의 언어와 질병관으로 재무장하지 않으면 한 발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적으로 질병예방과 치료효과를 검증받지 못한 의학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
◇의료일원화 앞당길 때
한의학이 철학적인 성격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환자를 치료한다는 면에서는 어디까지나 응용과학 중 하나다. 2002년 한국의학교육협의회가 주최한 의학교육과정 통합을 통한 의료일원화 모색 토론회에서 오희철 교수(연세의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의학대학의 임상과목 학습목표를 조사한 결과 의과대학 학습목표의 약 75%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한의학 스스로 의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응용과학으로서 기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의학과 한의학이 추구하는 궁극적목표는 국민의 건강증진과 질병치료에 있다. 때문에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선의 치료법과 진리를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의학과 한의학이라는 이원적인 의료제도와 체계 하에서 국민은 어떤 치료법을 선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며, 생명을 담보로 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도 맞을 수 있다. 잘못된 선택은 때론 치명적 결과를 안겨줄 수도 있다.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비교·평가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의학과 한의학계가 발 벗고 해결해야 하는 일인 동시에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국가가 앞장서야 하는 일이다.
이원적 의료로 인해 사회적인 비용의 낭비문제도 심각하다. 한정된 의료자원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용효과적인 의료제도와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보장과 사회보험은 정권의 명운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사안인 만큼 의료와 한방의료의 비용효과를 철저히 비교·분석해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원적 의료제도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갈등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의료계는 한의사의 CT 사용이 적법하다는 판결에 대해 "경악한다"는 반응과 함께 면허증 반납 투쟁까지 언급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예고하고 있다. 한의계는 한의계대로 모든 진단장비의 합법적 사용은 물론 의료기사 지휘권까지 획득해 양진한치(洋診韓治)의 숙원을 풀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국제화 시대와 시장개방 시대를 맞았음에도 한의학은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 통용되지 못하는 한의학의 비과학적인 울타리에 안주해 있는 동안 카이로프랙틱·TENS·허브 등이 보완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역수입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의료일원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 연구를 통한 학문적인 교류, 교육과정의 교류, 제도·재정적 지원, 국민 인식 개선, 법률 개정 등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다. 의료일원화를 위한 논의는 국민의 건강증진과 질병치료를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