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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던 '사랑의 빚' 돌려주는 삶은 '빛'
받았던 '사랑의 빚' 돌려주는 삶은 '빛'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6.1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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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튼튼소아과의원 김순남 원장

경기도 일산의 작은 상가 내에 자리 잡은 연세튼튼소아과는 흔쾌히 인터뷰를 승낙한 김순남 원장(41)이 얼마 전에 공동 개원한 소아과다.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아이들이 끊이지 않는 듯 보여 슬며시 걱정이 되던 차에 공동 개원한 또 다른 원장의 도움으로 인터뷰 일정을 맞추었다. 다소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들려준 이야기에는, 라오스와 베트남과 필리핀의 실상과 더불어 의료봉사에 대한 굳은 신념과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 라오스서 경험한 '베푸는 즐거움' 

"봉사라고까지 말하니, 쑥스럽네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건데요, 뭐.나이도 어린데 과분한 칭찬입니다."

김순남 원장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국제협력단 소속 정부파견의사로 라오스에서 소아환자를 치료하고, 이동진료 사업을 했다. 다소 생소한 국제협력단에 대해 물었다.

"외교부 산하에 있으니, 민간단체는 아니죠. 요즘은 젊은 의대생들이 군대 대신 자원하는 경우도 많고. 어릴 때부터 약사인 어머니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 의사 되면 좋다는 건데, 그 이유가 돈을 잘 벌어서도 명예롭기 때문도 아니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이었어요."

김 원장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막연히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왔고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 1989년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김 원장에게 있어 가풍과 가훈, 어머니의 말씀보다도 더 중요했던 건 깨우침이었던 것 같다. 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교와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세대학교를 다니면서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중학생 소년 시절부터 함께 한 신앙 역시 커다란 믿음이 됐다.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알려지지도 않고, 깨어있지도 못한 나라 조선에서 시작한 의료 봉사를 통해 개화와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로움을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 돌려줘야 하는 건 당연해요. 사랑의 빚을 갚자는 거죠.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의사일진대, 자기만 편하자고 손놓고 있을 수 있나요. 물론 의사가 되기 위해 십여 년 동안 트레이닝 받는 일은 굉장히 힘들지요. 하지만 그렇게 얻은 것은 누리는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돌려주어야 하는 삶을 위한 것입니다."

김 원장은 군 제대 후 97년경 국제협력단에 소아과의로 자원신청을 했다.

"연락이 안 오길래, 안 되었나보다 하고 성남중앙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죠. 그런데 2년 만에 연락이 온 거에요. 자리가 났다고. 하던 일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처음엔 고민스러웠죠. 아내와 상의했는데, 기회가 되면 가볼 만하다며 적극적으로 추천하더라고요. 지금은 저의 고맙고 든든한 후원자죠."

 

■ 불편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삶

과감히 정리하고 선택한 라오스행은 다시 한번 돌려주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동남아에 있는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 이것이 바로 라오스를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에요. GNP는 200불이 채 안 되고, 의료수준도 열악하기 그지없어요. 신생아는 열명 중 한명 꼴로 죽어나가죠. '모바일클리닉'이라는 이동 진료팀을 구성해 비엔티안(라오스의 수도) 뿐만 아니라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거든요. 갈 데는 많은데 도움은 한정되니 답답하기도 했어요."

김 원장은 병원 안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는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동할 수 있는 진료팀을 구성했음은 물론, 현지 언어인 라오스 말을 따로 배우는 열정을 발휘했다. 오전 내내 진료를 하고 오후에 시간을 내어 라오어를 배웠다. 그 때 익힌 라오어는 동료의사들의 교육이나, 예방교육에 매우 적절하게 쓰였으며 무엇보다도 진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고. 라오스 말을 할 줄 아는 김 원장은 지금도 한-라오스 간 의료분야 협력 증진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라오스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참 착하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르죠. 싸울 줄도 모르고. 그 순진한 국민성이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요. 아내가 티푸스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고, 아이들도 힘들어했지만…많이 그리워요. 생각해보면 아이들 교육에도 도움이 됐고…."

라오스에 대한 애착이 많을 수밖에 없는 김 원장은 그 때를 회상하며, 불편했지만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알려지지도 깨어있지도 못한 나라 조선을 찾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주변의 힘든이와 함께하는 삶

김 원장의 의료봉사가 비단 라오스에만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2003년부터 매년 라오스 비엔티안 미타팝 병원에서 언청이와 안면 기형 환자 수술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보다 글로벌 케어 소속으로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97년 인연을 맺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실행의원'으로서 각종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 매달 파주 광탄면 소재의 오산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Bridge Project'라는 이름으로 심야 거리 청소년들을 진료한다. 이는 YMCA와 협력하여 약 2년 전부터 시작한 일종의 선도 활동이다. 두산타워 앞에서는 매주 금요일 공허함으로 가득 찬 가출 청소년들이 줄을 잇는다. 작년부터는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 등 심신장애자 재활센터(강원도 횡성 소재)를 방문 진료하고 있는데 이런 활동들은 모두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가능하다.

"공동 개원한 이유가 바로 그거죠. 베풀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고 싶었어요. 함께 개원해서, 제가 다른 짓(?)을 할 때마다 기꺼이 도와준 제 동료에게 특히 고마워요. 가족의 후원 이상으로 큰 힘이 됩니다. 젊은 의사들에게 공동개원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이유죠."   

또 얼마 전 인도네시아 쓰나미 피해 지역에 다녀온 그는 "피해 난 직후 갔었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달라진 게 별로 없더라"며 안타까움을 전한다.

훗날 50대에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김 원장. 지금까지의 도움은 그저 맛배기에 불과하다며 손을 내젓는 모습은 참된 의료 봉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국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라오스에서 활동하며 소위 의료 교류의 문을 열었지만, 겸손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꿈에 대해 확신에 차 이야기 하는 모습 말이다.

"라오스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요. 훌쩍 커버린 아이들 교육 때문에 발길을 돌렸지만, 여력이 되는 한 라오스에 상주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도울 겁니다. 저보다 훨씬 젊은 의사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고 싶어요."

베푸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김 의원이 라오스 혹은 제3세계에서 그 이름 석자를 더욱 빛낼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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