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분만연구회 김상현 회장
사실 인권이 고려되지 않아도 사회는 굴러간다. 그러나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인권, 즉 개개인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 있어야 한다 . 인권을 고려한다는 것은 '사회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당연한 상식을 지켜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권운동가를 만나본 적이 있다. 그를 통해서 인권을 지키는 일에 몸 담는다는 것은, '나의 인권'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남의 인권'까지도 지켜줘야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권운동은 구체화될수록 좋다"는 전태일의 말마따나 군인의 인권, 청소년의 인권, 외국인노동자의 인권 등 '인권'을 갖다 붙이는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사회는 이미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사회가 군대, 학교, 공장으로 대변되는 사회 시스템을 우선시하며 달려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그러한 시스템 유지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또한 시스템을 유지해 온 장본인은 바로 그 시스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열고 접는 인간들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권분만'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출산이라는 영역에서까지 인권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과연 출산에서까지 인권을 고려할 일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 분만에서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권분만은 르봐이예 분만·수중 분만·그네타기 분만 등 분만의 방법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산모와 태아의 인권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철학적인 차원의 개념입니다."
김상현 동원산부인과 원장의 말에서 '인권분만'의 맥을 짚었다. 인터넷에서 인권분만을 검색해보면 김 원장이 열거한 것과 같은 각종 '독특한' 분만법들이 소개된다. 김 원장은 그러한 분만법들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 인권분만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분만대에 있는 산모는 환자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분만하는 과정도 병원과 의사 중심체계로 이뤄졌죠. 산모가 똑바로 누워서 몸을 결박당한 채 분만하는 과정은 엄밀히 말해서 폭력에 가깝습니다. 태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아이가 처음 나왔을 때 아이를 거꾸로 들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사와 환자가족이 아이의 건강함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 태아를 위해서는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산모와 태아를 존중해주는 분만, 그것이 바로 인권분만이죠."
사실 출산에 대한 개념은 바뀌었는데 출산법은 여전히 과거의 것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에는 출산이 노동력을 창출하는 과정이고, 산모는 노동력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출산을 인격체의 탄생으로 인식한다. 그만큼 출산방법도 '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김 원장의 생각이다.
"아이 낳는 것은 축제와도 같은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주위에서 축하연주까지 곁들이면서 대단한 관심을 보입니다. 출산과정에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연적인 고통 이외의 것은 최소한 감소시켜 주어야 합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고 싶은 자세로 낳고, 아이가 세상으로 나왔을 때 뱃속에서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줘 스트레스를 최소화 해주는 것, 그것이 분만대에서의 인권을 존중하는 출발점입니다."
■ 남편도 첫째 아이도 함께 하는
출산
<먼저 자연스러운 출산을 위해서는 진통 중에 산모의 운동을 제한하지 않는다. 산모와 태아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주기 위해 분만 환경을 가능한 집과 같은 분위기로 꾸미고, 환한 조명을 피하고 조명등 두어 개로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두운 자궁 안에 있던 아기가 갑자기 밝은 빛에 노출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분만 중 아기의 머리가 거꾸로 보이면 의학적으로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는 선에서 빛을 최대한 줄여줬다. 아기가 탄생하면 곧바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하지 않고 즉시 엄마의 가슴에 덮어줘 엄마의 심장소리에 안정되게 했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폐호흡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탯줄은 맥동이 멈춘 후 서서히 잘랐는데, 아빠에게 탯줄을 자르게 했더니 감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뒤 37도의 물에 아기를 넣어 양수로 돌아간 느낌을 갖게 해줬다. 분만실에 들어와 있던 첫째 아이는 내내 긴장한 얼굴로 분만과정을 지켜보다가 물 속 아기를 보고 신기해하며 웃기 시작했다.>
김 원장이 소개한 르봐이예 분만법이다. 한때 방송에 수중분만이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요즘은 대부분이 르봐이예 분만을 선호한다고 한다. 분만과정만 보아도 산모와 태아, 그리고 가족들까지 얼마나 배려해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산모와 태아를 배려한다는 것은 의사의 편리함을 일정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포기된 편리함 만큼 병원과 의사는 갑절의 힘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사실 분만실에 보호자가 있으면 산모는 안정되겠지만 의사는 불편해지거든요. 왠지 감시받는 느낌이 들어서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합니다. 또 분만시간이 많이 걸리고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거든요(웃음)."
김 원장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권분만에 뛰어들어 몸소 실천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의 산부인과 의사 프레드릭 르봐이예가 쓴 <폭력없는 탄생>이란 책 덕분이었다. 김 원장은 이 책을 통해 아기를 배려하는 분만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물론 책 한 권이 그의 분만철학을 일시에 바꿔놓은 것은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는 이미 전문의를 취득한 후 미국인 조산사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새로운 분만법을 체험했었다.
"80년대 중반이었는데도 그 조산사는 산모가 원하는 자세로 분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저는 산모가 서서 분만하는 것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경험이 시초가 된 데다 르봐이예의 책이 인권분만으로 전환하는데 촉매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 산모교육 앞장서 '폭력없는 탄생' 주도할 것
르봐이예 분만법을 시작한 지는 5년이 넘었다. 사실 처음에는 형식적인 차원에 그쳤지만, 점차 인권분만의 개념에 근접하는 분만법을 자리잡아갔다. 르봐이예 분만법에는 없는, '아기를 엄마품에 안겨준 뒤 젖을 물리기' 방법도 김 원장이 고안(?)해 낸 것이었다.
"저는 모유수유를 적극 권장합니다. WHO에서 밝힌 바와 같이 아기가 태어난 지 1시간 이내에 엄마젖을 빨면 모유수유 성공률이 90% 이상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시행하는 분만과정의 종착역은 늘 엄마젖 물리기입니다."
그는 2000년 '인권분만연구회'를 결성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10여개의 병원들이 회원이다. 김 원장은 인권분만연구회를 중심으로 출산문화를 바꾸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산모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산모 스스로 본인과 태아의 권리를 알아야 하거든요. 산모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산모교육을 위한 공통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권도 아닌 남의 인권을 지켜나가는 그의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더러는 산모조차도 귀찮다는 반응을 보일 때도 있고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이 '그럼 우리는 비인권 분만을 하고 있느냐'며 반박해오기도 한단다.
무엇보다 과연 인권분만이 태아의 건강과 인성에 영향을 끼치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확고했다.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지만, 저는 인권분만이 산모와 태아의 인권을 존중해주는 것임을 믿습니다. 유럽에서 조사된 바로는 청소년기에 약물중독·자폐증·자살 등에 이른 아이들의 출생기록을 추적해보면 난산이나 '충격적'인 분만인 경우가 많거든요. 탄생하는 순간부터 인권을 고려하는 것은 인간존중의 출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