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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잇는 의술 '나눔의 실천'

3대 잇는 의술 '나눔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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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2.0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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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복음외과 김의동 원장

진해복음외과 김의동 원장이 해외 의료봉사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이다. 방글라데시 선교회 목사의 부탁으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일주일 동안 진료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 다음 해 굿네이버스에서 활동하는 선배가 르완다 사태로 현지에 파견할 의사가 필요하니 소개해 달라며 연락을 해 왔다. 방글라데시에서의 감동이 떠올라 "내가 직접 가겠다"고 말하고 아예 3주간 병원 문을 닫아버렸다. 그 후 13년간 김 원장은 말레이시아·르완다·인도·필리핀· 스리랑카 등으로 의료봉사를 다녀왔고, 복음외과가 휴업하는 것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 김의동 원장

■ 부창부수, 13년 의료봉사 베테랑 부부

"젊어서는 못 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기백을 가졌던 나였지만 이제는 50대 후반을 넘은 중년의 의사로 변했다."  진해복음외과 김의동 원장(57)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사가 된 지 30년을 맞아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회고 중 일부이다. 하지만 동감을 표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듯 싶다.

올해 1월에 쓰나미 사태 피해자 응급진료 지원을 위해 8일간 스리랑카에 다녀왔고, 10월에는 9일간 파키스탄 지진 대참사 현장인 바라코트에서 인술을 펼치고 왔으니 말이다. 기백이 넘치는 젊은 의사라도 힘들 일정이다.

 

■ 긴급구호활동에서 얻은 교훈

김 원장은 쓰나미의 참상을 듣고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에 의료봉사를 신청, 병원을 휴업하고 부인 이성애(52) 씨와 간호사 김정미·박영미(34) 씨를 데리고 현지로 떠났다. 이들이 간 곳은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160㎞ 떨어진 해안도시 마타라. 3천여 명의 이재민들이 있던 그곳에서 김 원장 일행은 응급처치를 하고, 감기와 천식, 피부병 등에 걸린 일반 질환자 뿐 아니라 풍토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해외 의료 봉사를 시작한 지 13년이나 되었는데 이전과 달리 쓰나미 때는 장인 어른도 말리시더라구요. 콜레라가 돈다고 위험하다구요. 저는 '콜레라가 도니까 의사가 필요합니다'라고 설득했지요."

의사로서의 사명감, 신앙인으로서의 소명, 그리고 10여 년 동안의 해외 의료봉사 경험 등을 믿고 지원했지만, 긴급구호 활동은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고, 생전 의사를 본 적이 없는 오지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이번 활동을 통해 김 원장은 이전에 배우지 못한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돕는 것은 참으로 선한 일이지만 선한 마음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지혜롭게 돕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긴급 상황인데 무조건 돕는 게 우선이지 이것저것 따지면서 어떻게 일하냐고 말하지만, 긴급 상황일수록 정말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규모의 긴급구호 상황이 발생하면, 세계 각국 NGO들의 활동이 앞 다투어 시작되는데, 그러다 보니 초반에는 이동거리가 수도에서 멀지 않고, 물품 조달이 비교적 쉽고, 기관 홍보가 잘 되는 지역에 봉사자들이 몰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 올해 쓰나미 피해 지역을 찾았을 때 굿네이버스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고민했고, 우선 의료활동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차츰 지역민들의 필요를 보며 움직였다. 김 원장은 이런 방법에서도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수혜자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활동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한정된 지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는 것.

"굿네이버스에서 우리(김 원장, 부인, 간호사 2명)처럼 팀워크가 잘되는 팀은 처음 본다며 놀라더라구요. 하루에 200명도 수월하게 처리했으니까요. 보통은 개인적으로 지원한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임의적으로 팀을 구성하기 때문에 팀워크가 발휘되기 힘든 게 당연하죠."

▲ 르완다에서 (左), 파키스탄에서 (右)

■ 부자가 되기전엔 봉사 안하리라

김 원장의 부인은 해외 의료봉사 13년 베테랑이다. 진료를 하는 건 아니지만, 현지에서 봉사단의 '주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스리랑카에서는 20명의 식사를 책임졌다. 일간지와 방송사 기자들이 '굶을 각오하고 왔는데, 이렇게 잘 먹을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사람들이 제 몫을 다 할 수 있도록 내조를 톡톡히 하고 있다.

복음외과 간호사들은 멀티플레이어다. 김 원장은 간호사를 채용할 때부터 해외 진료를 갈 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채용이 되면 담당 업무를 규정하지 않고 6개월간 모든 일을 다 배우도록 한다. 팀 워크의 비결이다.

"벌써 23년 동안 진해에서 외과의사로서 삶을 살았다. 군대 생활까지 하면 24년을 진해에서 살았으니 나의 인생의 반을 진해에서 산 것이다. 개원하여 두 달 십 일만에 급성 간염으로 한 달 반을 문을 닫았고, 결혼 10주년 때에 여행을 위해 한 달간 문을 닫았으며, 의료 봉사차 13번을 1주일에서 3주일 정도 문을 닫아 걸었다. 여러 날 병원 문을 닫는 것이 우리 병원의 특징인 것 같다."

하루에 대한, 삶에 대한 소고를 적어 두는 그의 미니홈피에서 만난 글귀이다. 이 글귀에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담겨 있다.

사실 김 원장은 '가난이 싫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김 원장의 부친 역시 의사였지만 그는 흔히 생각하는 '의사의 아들'이 아니라 '공무원의 아들'로 살았다고 한다. 넉넉하기는커녕 늘 배가 고플 정도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 원장의 부친은 의사로서 보장된 지위와 수입을 포기하고 평생을 나병환자의 재활과 치료를 위해 헌신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5남매인 김 원장의 가족들은 늘 배고프고 힘겨운 생활을 면하지 못했다.소록도, 대구 칠곡병원 등 나환자들 가까이서 살다 보니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부자가 되기 전에는 절대 봉사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되돌아 볼 틈 없이 달려온 김 원장은 생명까지 위태로울 만큼 간수치가 높아져 한 달이 넘도록 입원하고 있을 무렵 난생 처음 여유가 얼마나 좋은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었던 아내의 도움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진 걸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재산뿐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술 역시 나눠야 한다고 여겨졌다.   

 

■ 3대 잇는 의술 나눔의 실천

평생 나환자들 곁에 머무신 부친을 원망했던 김 원장이지만 그 역시 두 아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은 없다. 나는 모든 걸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라고 각인시켜왔다. 젊어서의 김 원장처럼 지금 두 형제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겠냐고 묻자, "공부는 시켜주지 않느냐?"며 "큰 아들은 지금 의대 본과 4학년이고, 작은 아들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들 나이 때 부자가 되기 전에는 봉사 안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아이들은 벌써 해외 봉사활동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라고 자식들이 자신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한다.

결국 3대가 모두 자신들이 가진 의술을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의 신앙에 대한 의지가 인터뷰를 마치면서 '나눔이 없는 의술은 기술일 뿐이다'라는 말로 해석되었다.

"이제는 힘든 일을 하면 몸에 무리가 와서 쉬어야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자족할만합니다. 23년을 정말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합니다. 바람이 있다면 노년에는 어려운 나라에 무료 병원을 세우고 마지막까지 내가 가진 의술을 나눠주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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