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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사로 산다는 것
여의사로 산다는 것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12.2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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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주 서울대학교병원 진단방사선과 임상강사

벌써 며칠째, 깨어있는 아들녀석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낼 모레면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새삼스레 공부를 하겠다고 풍족하고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펠로우로 들어온지 이제 몇 개월이 지났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인지 그새 그 지긋지긋하고도 힘들었던 수련의 과정을 까마득하게 잊고, 왠지 도태되어 간다는 느낌에 빠져, 다시 멋지게 논문도 쓰고 무언가 productive한 일을 해보겠다며 용감하게 칼을 빼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녹록치 않았다.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을 할애하면 할수록 내 아이와 가정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을 그만큼 줄여야 하는 모순이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당장 아들놈을 친정엄마에게 맡기면서, 이제는 전문의까지 땄으면 뒷바라지는 다 했다고 생각하셨을 엄마에게 또 짐을 지우는 것이 죄송하고, 한창 엄마손이 필요한 아이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 미안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안감과 진정 어떤 것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오늘 우연히 병원에서 세미나에 참석하러 온 대학선배를 만났다. 영어도 잘 하고 공부도 엄청 잘 했던 선배는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소위 불가능을 모르는 능력의 소유자로 대학교 때 나는 그가 나와는 다른 분류의 족속일 것이라 여기던 터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문에 직장다니는 엄마의 자녀와는 놀지도 말라는 글이 났다는데 걱정'이라는 둥, '나자신 남에게 뒤떨어지기 싫으면서도 그래서 아이가 잘 되지 않을 경우엔 자신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둥, 나와 똑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는 선배를 보면서, 이러한 딜레마가 결국 모든 여의사들이 갖는 공통의 과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들 중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어떻게 발란스를 맞추느냐가 결국은 우리의 가치관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사회생활에서도 어느정도 당당한 위치에 있고 가정생활도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분출시키며 고달프게 살아야 하는 지도….


예전에 읽었던 에릭시걸의 '닥터스'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을 세 분류로 나누는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의사라는 구절이다.

여자로 대변되는 가정에서의 역할과 남자로 대변되는 사회에서의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제 3의 성. 여의사로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힘들수록 그 일을 수행했을 때 환희도 크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자, 여의사들이여, 모두 힘을 내자구요. 아자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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