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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에세이]우공, 산을 옮기고는...
[신년에세이]우공, 산을 옮기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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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2.2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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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에 나는 제주도에서 '몽골 말몰이 쇼'를 관람하였다. 징기스칸의 후예라고 하는 몽고인의 말몰이 기술과 제주 조랑말의 강인함을 보이려는 제주도민의 합작 관광 상품이었다.

지름이 약 30미터는 되어 보이는 원형극장에서 여덟 명의 젊은 기수들이 갖가지 묘기를 부렸다. 말 등에 눕기도 하고, 뒤를 보고 말에 앉아 달리기도 하고 말을 탄 채로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기도 하였다.

그런데 극장 중앙에 지름이 3미터 정도 되는 초록색의 원이 있고 그 안에 수염을 기른 나이든 사내가 채찍을 들고 서 있었는데, 말이 극장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을 지켜보며 작은 원을 한 바퀴씩 돌고 있었다. 그는 가끔 채찍을 돌려 바닥을 치기도 하였다.

기수가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지만 말의 눈은 그 사내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심장내과 교수에게 물었다. "저 친구가 박동조율기(pacemaker) 인가요?" "그래요. 곡예를 하는 동안 말들이 곡예의 페이스에 맞도록 달리게 해 주죠."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이로 마라톤에서의 '페이스메이커'가 있었다. 바라는 최고기록시간에 따라, 각 구간별(1㎞, 5㎞ 단위)로 그 기록을 낼 수 있는 속도를 정해서 맞추어 달리고는 완주는 못한 채 기권하는 선수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우승 후보 동료들의 기록갱신을 위하여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해가 밝았다. 올해 나는 만 50세가 된다. 교직에 몸담아 후학들을 가르친 지 16년이 되었다. 내가 65세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이제 막 반환점을 돈 셈이다.

여태껏 젊음의 패기로 늘 앞장서서 달려가며 화려한 조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영광 뒤에는 채찍을 들고 말을 주시하는 박동조율기 같은 원로교수님의 노고가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내가 이세일 교수님을 모시고 일한 지가 만 11년이 되었다.

11년 전 이교수님은 국립의료원장으로 계시다가 인하대학으로 오시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하며 산을 헐어 옮기기 시작한 우공(愚公)처럼 인하의대 성형외과를 만드셨다.

그렇게 인하대학에서 묵묵히 산을 헐어 옮기신 지 11년, 정년퇴임을 꼭 반년 남기시고는, 길러낸 제자들이 막 싹을 내리기 시작한 가천의대에 초빙되어 가시게 되었다. 그곳에서 또 다시 산을 옮기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러기들은 무리를 지어 날 때, 한 마리가 선두에서 나머지 무리를 이끌며 V자 모양으로 난다. 그러다가 그 뒤에서 따라오는 기러기에게 무리를 이끄는 역할을 넘겨준다.

원로교수님이 이끌어 주신 기러기들을 이제는 내가 선두에 서서 이끌어가야 한다. 날개가 무거워진다. 과(科)를 맡은 책임이 어깨를 짓누른다.

군사를 거느리고 고국에 돌아오다가 길을 잃었을 때 노마(老馬)를 앞세워 길을 찾은 제나라 명재상 관중(管仲)의 지혜가 그리워진다.

름난 조련사는 이미 훌륭한 준마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어린 말을 준마로 키운다. 그렇게 원로교수님은 인하대학을 준마로 키워가셨고, 나에게 채찍을 쥐어주셨다. 준마(駿馬)는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린다.

나는 말의 눈을 바라보는 그 매서운 눈매를 배워야만 한다. 원로교수님께서 훌륭하게 성장시키신 준마를 더욱 눈부신 명마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2월 말에는 제자 두 명이 박사학위를 받을 것이며 3월에는 석사과정에 한 명이 입학한다. 그 어리석은 늙은이(寓公)가 산을 헐어 삼태기에 담아 등에 지고 바닷가까지 다녀오며 큰 산의 한 귀퉁이도 옮기지 못하였어도 자자손손 계속하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듯이, 비록 나 하나의 역할은 보잘 것 없더라도 나의 제자들이 내가 하던 일을 이어준다면 언젠가는 큰 업적이 될 것이다.

나의 제자가 내가 놓은 돌다리를 밟고 가서 또 하나의 돌다리를 놓고 그의 제자가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건너편 언덕에 다다를 수 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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