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학자의 학문 사랑 '외길 50년'

노학자의 학문 사랑 '외길 50년'

  • 송성철 기자 songster@kma.org
  • 승인 2007.01.2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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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휘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박용휘 성애병원 PET-CT센터 소장(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이 최근 독일의 세계적인 과학저서 전문출판사 슈프링어(Springer-Verlag)에서 <Combined Scintigraphic and Radiographic Diagnosis of Bone and Joint Disease> 제3판을 펴냈다. 165년 전통을 자랑하는 슈프링어 출판사는 과학·의학·경제학·공학·건축학·교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간 1450종류의 저널과 5000권에 달하는 책을 펴낼 정도로 외형적인 규모는 물론이거니와 15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그들의 저서를 출간했을 정도로 질적인 면에서도 세계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책을 펴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목을 받을만한 일이지만 제3판까지 책을 낸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슈프링어에서 나온 저서 가운데 85%는 초판으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이번 제3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 슈프링거 편집진과 함께

 

 ■ 165년 전통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3판 발행 '금자탑'

"초판이 1994년에 나왔으니까 꼭 12년 만에 3판 개정판을 내게 된 셈 입니다."

빼곡히 자리를 잡은 책장에서 방금 도착했다는 538쪽의 두툼한 책을 박용휘 명예교수에게서 건네받으면서 집필기간 내내 또 저 노학자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정열을 쏟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 졌다.

이번 제3판도 제2판(2000년 발행)의 서문을 쓴 세계적인 핵의학자 헨리 와그너 교수(존스홉킨스대학)가 펜을 들었다. 제2판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라고 평가한 와그너 교수는 제3판 서문을 통해 "이제 고전(classic)의 반열에 들었다", "또 하나의 위대한 공헌을 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좀처럼 다른 나라 학자를 칭찬하는 법이 없는 세계적인 학자가 미국인도 아닌 동양인 학자에게 이렇듯 최상급 표현(greatest contribution)을 하는 것은 결코 흔하지 않은 일.

와그너 교수는 무려 25년 동안 바늘구멍 조준기에 매달려 핵의학 영상진단의 영역을 해부학적 구조변화 뿐만 아니라 생화학적·분자학적인 변화까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지평을 넓힌 박 명예교수의 땀과 노력에 감탄과 경의를 표했다.

"원고와 자료사진 한 보따리를 싸 들고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던 기억이 납니다."  

박 명예교수는 독일행 비행기에 앉아 슈프링어 출판사로 향하던 15년 전의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원고 보따리에는 해부학적인 구조변화를 포착하는 데 머물렀던 X선 진단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화학적 변화와 기능을 파악할 수 있는 핵의학적 영상진단에 관한 연구결과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국의 영상의학은 이미 세계 네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계속하고 있고, 특히 핵의학은 지난해 가을 세계핵의학회 학술대회를 성공리에 치를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지만 당시로선 한국방사선의학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박 명예교수는 한 미국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다.

피땀 흘려 얻은 연구결과가 사장되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슈프링어 본사로 날아간 박 명예교수는 편집진들과 담판을 벌였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던 편집진들도 박 명예교수의 연구결과에 혀를 내둘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4년 <Combined Scintigraphic and Radiographic Diagnosis of Bone and Joint Disease> 초판이 세상의 빛을 봤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영문판 저서를 출간한 이정표도 세웠다.

제3판 발행의 책임을 맡았던 우테 하일만 슈프링어 임상의학부문 편집사장은 기존의 평면적 진단에 머물던 진단분야에 생화학적 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학문적으로 정립한 박 명예교수의 연구결과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하일만 편집사장은 최근 박 명예교수에게 유례없는 감사장을 보내왔다.

슈프링거는 최근 아시아지역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우수한 의과학자들이 활발히 연구논문을 쏟아내고 있는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핵의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한 하일만 편집사장은 한국의 우수한 의과학자들과 손잡고 한국의 성과를 세계에 알리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아시아와 슈프링거의 연결고리에는 15년 전 혈혈단신 독일로 날아가 담판을 벌인 박 명예교수와의 각별한 인연이 단단히 자리를 하고 있다.

 

■ 출판 맡은 우테 하일만 편집사장 "자부심 느낀다" 밝혀

박 명예교수의 바늘구멍 조준기에 관한 연구는 평생 방사선과 씨름하며 판독실에서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 중 하나다. 해부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생화학적 변화는 박 명예교수의 연구를 통해 발전과 진화를 거듭했고, 비로소 실제 진단에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핵의학 영상진단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박 명예교수는 슈프링어와의 인연을 계기로 <Nuclear Imaging of the Chest>(1997년), <Molecular Nulcear Medicine: The Challenge from Genomics and Proteomics to Clinical Practice>(2003년) 등 다섯권을 발간했다. IAEA에서 펴낸 <Radioaerosol Scan of the Lung>(1994년)를 비롯해 국내에서는 수문사를 통해 <흉부X선진단>(1979·2000년), <복부X선진단>(1980), <상부소화기X선진단>(1983년), <하부소화기X선진단>(1985년), <흉부화상진단>(1990년)을 선보였고, <인체방사선해부학>(서울외국서적, 2000년)을 집필했다. 강형근 전남의대 교수와 함께 <소화기방사선진단학>(아카데미아, 2004년)를 펴내는 등 지금까지 모두 14권의 교과서를 저술했다.

올해 78세인 박 명예교수의 학문에 대한 사랑과 탐구심은 30∼40대 청년 의사들 못지않다.

"노년이 되면 빠져들기 쉬운 게으름과 고집스러움을 털어 버리기 위해 교과서 집필에 더 매달렸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 읽는 것과 필름을 보면서 연구하는 일 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욕심 없이 살 수 있도록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박 명예교수는 새로 출판한 영문 교과서 이야기는 접어둔 채 어떤 삶이 사람답게 사는 삶인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박 명예교수는 "앞으로 더 유능한 후학들이 4판과 5판을 계속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서 "최근 들어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후학들이 많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박용휘 명예교수가 걸어온 길]

박 명예교수는 1953년 전남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레터만병원과 보스톤 시립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다. 1962년 가톨릭의대에 부임해 1995년 정년을 맞을 때까지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대한방사선의학회장, 대한핵의학회장, IAEA 고문 등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과 임상진료 그리고 방사선의학 및 핵의학 발전에 정열을 쏟았다. 196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학술논문을 <Radiology>에 게재했으며, 1974년 <British Journal of Radiology>와 1987년 <Journal of Nuclear Medicine>에 국내에서 수행한 연구결과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발간한 첫 한국 의학자라는 이정표도 세웠다. 학계에서도 박 명예교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연구업적을 인정, 199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1999년 현재의 성애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핵의학과를 개설하고 PET-CT센터 창설을 주도하는 등 임상진료는 물론 왕성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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