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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학교-일요진료소로 '나눔의 생' 실천

송아지학교-일요진료소로 '나눔의 생' 실천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7.09.0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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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진료소 반상진 원장 (광주 동구·반상진이비인후과의원)

공자는 나이 70이 되어야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종심(從心)을 넘기고 여든을 앞둔 반상진 원장에게 봉사는 공자의 그 마음과 같다. 20여 만 명이라는 최대 환자수를 기록한 일요 진료소도, 송아지 학교로 대표되는 노작교육도, 마음이 먼저 가는 일이었다.

▲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료에 여념이 없는 반상진 원장.
세월 빗겨간 힘찬 손길에서 열정 읽다
"괜찮네. 괜찮아. 걱정하지 마소." 보청기를 착용해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겁에 질려 병원을 찾았다는 환자는 반상진 원장의 말에 왈콱 눈물을 쏟고 만다. "귀가 들리지 않으니 얼마나 겁이 났겠소. 보청기를 새로 사는 것도 걱정일 것인데, 다시 잘 들린다고 하니 내가 더 고마운 거 아니겠소." 여든을 앞둔 반상진 원장의 손은 청년처럼 힘이 넘쳤다. 귀로 관을 삽입해서 바람을 불어주고, 한 뼘이 넘는 굵은 바늘을 콧속에 넣고 처치하는 노 원장의 손길은 망설임 없이 분명했다.

송아지학교로 배움의 권리를 지켜주다
병원을 개원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1974년. 반상진 원장은 고창의 한 학교 법인의 인수를 제안받는다. 당시 고창의 중학교 진학률은 45%에 불과했다. 광주의 진학률이 95%였던 것을 생각하면 학습권 박탈에 가까웠다. 반상진 원장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없길 바라며, 학교를 인수하고 송파학원을 설립한다. 그렇게 탄생한 학교가 고창중학교(74년), 장성고등학교(84년)다. 고창중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인 사정이 좋지 않은 학생을 위해 '송아지학교'라는 근로장학제도를 만들게 된다. '송아지학교'는 등록금을 내기 힘든 아이들에게 송아지를 사주고 일년 후 학교가 재구입을 해서 등록금을 대신한다. 이렇게 사들인 송아지가 천 마리가 넘어 한때 송파학원의 목장이 호남에서 가장 큰 규모로 손꼽히기도 했다. 고창중학교와 장성고등학교는 지금도 명문 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다. 기숙사·장학제도 등 학생을 배려한 각종 제도가 아이들을 불러모으기 때문이다.

일요진료소로 20여만 명 치료하다
고창중학교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반상진 원장은 학교에 '일요진료소'를 개설했다. 일주일에 6일은 병원을 지키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학교에 마련된 일요진료소를 찾았다. 당시만해도 병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아픈 곳이 있어도 경제적인 문제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요진료소는 금세 입소문이 퍼지면서 하루 700~800명이 찾을 만큼 북새통을 이뤘다. 반상진 원장은 이비인후과를 전공했지만, 당시 일요진료소에서는 내과·정형외과·외과·산부인과까지 전 진료과목을 섭렵해야 했다. 80년대 초 언젠가는 고창 인근에 옴이 유행하자 치료약을 직접 고안하는 기지를 펼치기도 했다. 반상진 원장은 일요진료실을 이야기하며 부인 이야기를 꺼냈다.

수 십 년을 한결같이 일요진료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매주 길동무가 되어주고, 진료소를 함께 운영해준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반상진 원장과 그의 부인 김태임 여사의 일요진료소는 고창 읍내에 보건소가 들어오기 전까지 꼬박 20년 동안 계속됐다. 그 사이 일요진료소가 문을 열수 없었던 적은 폭설로 인해 길이 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던 단 하루뿐이라고. 20년을 지켜온 약속과 신념은 의료봉사를 홍보의 수단으로 여기는 요즘 세태를 말없이 질타하는 듯하다.

생명을 위해 두 번의 거짓말을 하다
반상진 이비인후과는 광주 도청과 불과 100m 남짓 떨어진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의 가장 치열했던 1980년 광주의사회장이었던 반상진 원장은 혼란의 중앙에 서 있었다. 5.18, 계엄령이 떨어지고 모든 상점의 문을 닫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반상진 원장은 사령부를 찾아가 진료를 선언했고, 평소보다 더 일찍 병원문을 열고 더 늦은 시간까지 진료를 했다. 그 와중에 뭇매를 맞고 있는 학생을 내 환자라 속여 도망을 보내고, 시민군에게 잡혀온 군인을 며칠동안 벽장에 숨기고 치료해 끝내는 살게 한 일을 마치 고운 추억을 꺼내듯 이야기한다.

반상진 원장이 그 학생과 군인을 구하기 위해서 생을 다해 꼭 두 번의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한다. "사람 생명이 중하지, 니편, 내편이 어디 있겄소." 혼란의 시절,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반상진 원장의 눈은 어느 때보다 힘에 넘쳤다.

반상진 원장은 일요진료소 운영을 멈춘 뒤에도 매주 일요일, 부인과 함께 고창과 장성 일대를 찾는다. 의약분업이 실시되고 약을 함부로 처방할 수는 없지만, 건강 상담과, 간단한 처치를 하면서 비공식적인 일요 진료를 계속해오고 있다. 연세도 많으신데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일요일에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제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그가 공자가 말한 종심(從心)에 이르렀음을 실감하게 된다.

뜻을 내세운 말을 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20년, 30년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약속을 지켜온 사람은 찾기 힘들다.

"한 게 뭐가 있어 이리 찾아오는가."라며 내내 불편해하던 반 원장의 겸손함에 행동하지 않는 자의 부끄러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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