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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주례사

아버지의 주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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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2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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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혁(GS-Caltex 부속의원장)

1975년 풋풋한 대학 신입생이었던 동갑내기 집사람과 나는 입학한 첫 해 3월 서클(옛날에는 이렇게 불렀다)에서 회원으로 처음 만나, 이듬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4년을 연애한 끝에 본과 4학년이 되는 해의 3월 1일 주변의 우려(?)와 축복 속에 결혼했다. 미대를 졸업한지 1년이 지난 집사람의 친구들이나 아직 학생 신분인 신랑 측 친구들이나 철이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결혼식이 아니라 무슨 단체 미팅 같은 분위기였다.

의대 본과 4학년의 생활이 다 그러하듯 그룹스터디 등으로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못 들어가는 날이 더 많았지만 젊고 건강한 우리는 이듬해 1월 튼실한 사내아이를 얻었고 이 아이가 27년을 자라 다음달인 12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

지난 8월 결혼을 결정하고 가족이 둘러앉아 일정을 상의하면서 자연스레 결혼식 주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독실한 기독교집안인 예비 사돈댁에서는 은근히 목사님을 밀어붙이는 분위기였지만 종교색이 짙은 결혼식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주례만큼은 우리 쪽에 맡겨달라는 고집(?)을 피웠다.

보통 주례는 신랑 신부와 양가 집안이 존경하면서 이후 바른 결혼생활의 지표로 삼으며 지도 받을 수 있는 분을 모시고, 그 분의 인생관과 결혼관을 들으며 그 분 앞에서 영원한 사랑에 대한 언약을 하고 두 사람의 결혼을 그 분을 통해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라 하지만, 사실은 결혼식장 바깥에 세워져있는 화환들의 크기와 숫자처럼 혼주들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과시하는 부분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는 않다. 심지어는 적당한 사례비를 주고 낯모르는 전문가를 주례로 모시고 하는 결혼식도 있다는 세상이 되었다. 나 또한 주례로 모실만한 분들의 면면을 생각하며 내심 되지 않은 저울질을 하는 자신의 속물근성에 대한 자책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해서 9월 한 달을 고민해 생각한 것이 바로 양가 아버지가 직접 예식을 주관하자는 것이었다. 실제 결혼식장에서의 주례의 역할은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다짐 받고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선언하며 덕담과 함께 준비된 주례사를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예식의 주관을 남에게 맡기기 말고 양가 아버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주관하는 것이 신랑과 신부에게도, 축하해주러 오신 하객들에게도 더 의미 있고 더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지 않을까. 다행히 예비사돈댁에서 흔쾌히 동의하시어 기본적인 예의와 격식에 어긋나지 않도록 심사숙고 하면서 서너 차례 고쳐가며 시나리오를 짜고 협의했다.

신랑 신부와 함께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양가 아버지는 나란히 주례 단에 올라가 각자의 아들딸에게 그들의 진심을 물을 것이다. 아들아(딸아) 너는 아무개를 네 아내로(남편으로) 맞이해 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아끼고 사랑하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손을 놓지 않는 평생 반려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이 아비 앞에 맹세할 수 있겠니.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다짐받은 양가 아버지들은 굳은 악수를 나누고, 두 아버지가 함께 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두 집안의 하나 됨을 만천하에 알리며 각자 새 가족을 맞이하는 기쁨을 하객들과 함께 할 것이다. 주례사를 하는 순서에는 서로의 사돈댁에 대한 감사의 말씀과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에게 하는 당부 등을 담은 아버지의 말씀으로 대신할 것이다. 기념사진만 찍고 헤어지는 주례, 신혼여행 후 한 번쯤 찾아가보는 주례, 일년에 한두 번 명절에나 찾아뵙는 주례와는 다르게 두 사람을 평생 지켜보며 평생 책임지고 평생 가르치는 참다운 예식의 주관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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