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 "규제 풀겠다"에 보험업계 '환호'
의료계 '관망에서 적극개입'으로 바뀌어야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보장 방식의 실손형 민영보험을 둘러싼 찬반 갈등이 새 정부 들어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측이 민영건강보험의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보험업계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반면, 그동안 반대해 온 시민단체는 긴장하는 분위기다.
실손형 민간보험을 둘러싼 논란은 2006년 초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해, 같은 해 10월 정부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가 민영의료보험 보장의 범위를 비급여로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극에 달했다.
정부는 법정 본인부담금까지 보장하면 의료이용이 급격히 증가, 가뜩이나 악화 일로에 있는 건보재정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보험업계는 "법정 본인부담금을 보장 못하게 하면 보험상품 설계를 할 수 없다"며 발칵 뒤집혔다.2006년 말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정부의 입장을 담은 '민영의료보험법안'을 추진하자 보험업계는 장외집회까지 열며 완강히 저항했다.
정부-보험업계의 대립에 시민단체까지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는 2006년 10월 성명을 내고 "보험업계가 법정본인부담금 보장을 고집하는 것은 민영의료보험 영역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 반발"이라며 비난했다.
2007년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입법 추진 의지가 시들해지고, 보험회사들이 실손형 민영보험 상품을 잇달아 출시하면서 표면적인 논란은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폭풍전야의 분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현재 본인부담금 보장형 민영보험 허용 여부를 둘러싼 대립 구도는 보건복지부와 시민단체, 건강보험공단은 반대, 재경부와 보험업계는 찬성측에 서있다. 보건의료학계는 다양하게 입장이 나뉘고 있으며, 의료계는 이렇다 할 입장 표명없이 병원업계가 찬성쪽으로 기운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핵심은 '건보재정에 미치는 영향'
논쟁의 키워드는 과연 보험회사가 법정 본인부담금까지 보장해줄 경우, 공보험인 건강보험의 재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복지부와 시민단체는 가입자와 공급자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 의료쇼핑 행태가 만연해져 결국 건보 재정 부담은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다. 따라서 민영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신의료기술 등 비급여 영역으로 보장범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대해 보험업계는 현행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으로는 인구 노령화 등에 따른 다양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충죽시키지 못하므로 공보험에 대한 민영의료보험의 '대체' 내지 '보충'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업계는 '본인부담금 보장이 전체 의료이용량을 상승시킨다'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도 반박하고 있다. 정부 말대로 의료이용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본인부담금을 전부가 아닌 일정 비율만 보장하는 방식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현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민영의료보험에 대한 정부 용역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 연구는 논란의 핵심인 '건보재정에 미치는 영향 분석'결과를 담고 있어, 어떤 결론이 도출되느냐에 따라 찬반 진영의 명암이 엇갈리게 될 전망이다.
보험업계 "게임은 끝났다" 확신
KDI 연구 결과는 늦어도 지난해 말경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정부가 이미 지난해 KDI로부터 연구논문을 제출받았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발표를 뒤로 미루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
특히 KDI는 '법정 본인부담금 보장형 민영보험이 건강보험 재정에 미치는 영향은 미비하다'고 결론 내렸으며, 보험업계 내부에서는 이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연구 결과에 잔뜩 고무된 업계가 이명박 당선자의 '민영보험 규제완화 방침' 소식에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S보험의 한 관계자는 "민영보험 활성화는 세계적 추세"라며 "새 정부의 현명한 선택으로 공보험과 민간보험이 상호 보완하며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의 기대와는 달리 새 정부가 실손형 민간보험 규제를 쉽게 완화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KDI 연구 결과만 믿고 건보재정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 하기에는 현재 재정 상태가 악화돼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 규제완화 쉽게 추진 못할 것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 7일 보건복지부로부터 건강보험의 잠재 부채가 5조6000억원에 달한다는 보고를 받고 '건강보험 특위'를 구성키로 결정할 만큼 건보재정 문제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당선자측의 '신중론'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특히 새 정부가 민영보험 규제완화 정책을 확정 발표할 경우 시민단체가 들고 일어설 것이 불보듯 뻔해, 이는 임기 초부터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데 대한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당선자가 구상하는 민영보험 규제완화의 내용이 일부 언론보도의 추측 보도와 업계의 '오버'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안명옥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자문위원은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건강보험의 민영화는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당선자께서 말하는 민영건강보험의 규제완화는 현행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차원"이라고 잘라 말했다. 공보험을 대체하는 민영보험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료계 '관망' 버리고 준비 착수해야
지금까지 의료계는 민간 의료보험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물론 대정부나 국회에 의견 개진도 없었다. 일부 보건의료정책 학자들이 토론회나 공청회에서 개인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 전부다.
그러나 민영의료보험에 대한 규제가 어떤 형태로든 완화될 가능성이 크고, 사회 여건상 의료보험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의료보험제도의 한 축인 의료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김계현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아직까지 본인부담 보장형 민영보험이 의료기관에 실질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한 어떠한 연구도 나와있는 것이 없다"며 "보장의 형태에 따른 의료기관의 진료과목별, 규모별 영향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민간의료보험이 확대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기관과 보험회사의 관계 설정 방식"이라며 "예를 들어 의료기관과 보험회사가 직접 계약을 맺는 방식은 규모가 작은 의료기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외국의 연구 사례가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권용진 서울대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도 "보험회사와의 계약 방식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며 "민간보험 심사 업무의 주체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도 의료기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손형 민영보험의 확대가 단기적으로는 의료기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의료계가 민간보험에 대해 철저히 대비해 두어야 앞으로 정부나 업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