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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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1.2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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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호(부산의료원 가정의학과 R3)

얼음이 잘 얼지 않는 따뜻한 부산이지만 며칠째 추워 어깨를 움츠려 다닌다. 눈 구경하기 힘든 곳에서 사니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눈을 한 번이라도 이번 추위에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뉴스를 보니 호남은 계속되는 폭설에 하우스가 내려앉고 도로 결빙도 많아 사고가 잦다고 한다. 피해를 줄만큼 내리는 폭설 말고 금방 녹을 수 있는 따뜻한 눈이라도 조금 와주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바삐 뛰어다니는 1년차와 점심을 먹으면서 요즘 뭐 기다려지는 거 없냐고 물었다. 우문에 현답으로, 새로운 신입년차 들이 무척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당직으로 몸이 피곤하니 일을 나눌 수 있는 신입년차들이 빨리 들어왔으면 한단다. 전공의 과정을 겪으며 누구나 생각하는 바람이다. 일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근무하는 시립병원은 행려 환자를 위한 병동이 따로 있다. 당뇨가 있던 환자인데 발에 난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위생 상태가 좋지 못한 곳에서 노숙하다 상처가 덧나 입원한 환자가 있다. 상처 소독하는데 그 환자가 말했다. 상처가 나아가는 게 불편하다고. 겨울을 병원에서 지내고 봄에 나가고 싶은데 빨리 상처가 낫고 당뇨가 조절되면 퇴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새싹돋고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겨울을 넘겨야 하는 절실함을 느꼈다.

행려 환자들을 위한 응급실에 경찰이 의식불명 환자를 데리고 왔다. 응급처치를 하고 혈액검사 결과를 보니 알콜성 케톤산증이 의심됐다. 산증을 교정하려고 노력하고 인공호흡기도 달았지만 결국 세상을 버렸다. 이제까지 연락을 끊고 살았다던 보호자가 뒤늦게 달려왔다. 흐느끼는 그들이 인연의 끈을 놓을 때까지 곁에서 기다린다. 담당의사로서 경과설명과 사망선언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몇 해 전 의대 본과 시절, 지리멸렬한 시험들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던 그때 무관심한 돌덩이였던 저를 곁에서 포근히 감싸주던 여자친구가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며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수능시험을 봤다. 시험장소인 명동 계성여고 후문에 서서 수험생 어머니들과 같이 기도하며 기다렸다. 목숨만큼 간절함을 보일 테니 어느 절대자든 그녀에게 힘을 주시라고. 살아오면서 겪은 몇안되는 길고긴 기다림이었다.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없는 거 같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 5년간 나라를 이끌고 갈 당선자는 모든 직종, 모든 사회계층을 안고 경제 개혁을 이뤄내겠다고 한다. 의료계에서도 기대가 큰 것 같다. 인수위에 모 의대 교수님이 포함돼 의사의 목소리를 대변할 기회를 잡았다고 한다.

보채지 않고 기다려 보려 한다.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의사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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