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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에 간 한국 최초의 여의사
비명에 간 한국 최초의 여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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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1.2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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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대한결핵협회 고문)

최초의 의사는 서재필(徐載弼)이며 최초의 여의사는 김점동(金點童)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을 이르켰다가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호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후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1893년 조지 워싱톤대학의 전신인 코크란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한때 의료활동을 했지만 국내에서는 개화와 외세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언론인, 계몽주의자로서 더 유명하며 의료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김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의료선교사를 도와 환자를 돌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 (현 존스홉킨스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해 곧바로 귀국하여 짧은 생애를 마감한 1910년까지 10년간 보구여관에서 환자진료에만 헌신한 명실상부한 의사였다.

김점동은 1877년 서울 정동 부근에서 아버지 김홍택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김홍택은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a) 목사를 도와서 일했던 사람으로 그의 권유로 1886년 열살된 딸 김점동을 이화학당에 보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 입학한 네번째 학생이었다.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여성선교회에서 조선의 여성교육과 선교를 위하여 파견한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세운 한국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었다.

이화학당에 입학한 그녀는 공부를 잘 했는데 특히 영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세례와 함께 에스더(Esther)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 이후로는 에스더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1893년 박유산과 결혼하면서 서양풍습대로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렀다.

1887년 스크랜튼이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전용병원(Salvation for All Women Hospital)을 세웠는데 후에 고종(高宗)은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뜻으로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박에스더는 보구여관에 의료선교사로 파견된 미국인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과 의료보조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도 장차 의사가 될것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로제타도 그녀의 성실성과 헌신적인 조력에 감동하여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로제타는 자신보다 1년 늦게 조선에 파견된 캐나다의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William J. Hall)과 1892년 서울에서 결혼했으며 홀이 평양선교기지 개척책임자로 임명되자 홀 일가는 평양으로 갔다. 그때 박에스더도 함께갔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홀 일가는 서울로 철수했으며 홀은 혼자 다시 평양으로 가 전여ㅁ벼ㅇ 환자를 돌보다가 그 스스로 발진티프스에 걸려 사망했다.

로제타는 남편의 유해를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고 그해 말 아들 셔우드 홀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 갔는데 그 때 박에스더와 그의 남편 박유산도 함께 동행했다.

로제타는 고향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에스더는 리버티의 공립학교에 입학했고 그녀의 남편은 셔우드 집안의 농장일을 도왔다. 한국에서는 선교 위주의 학습이라 내용이 단순했지만 거기에서는 과외비용을 지불하여 친구집에 합숙시키거나 기숙사에 보내 공부하게 해야 했다. 그 결과 에스더의 학교 성적은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그해 9월 그녀는 뉴욕의 유아병원에 취직하여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했다.

1896년 10월 1일 그녀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녀는 서양의학을 전공한 최초의 한국여성이었다.

1897년 가을 조선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로제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묻혀있는 조선으로 돌아가 남편이 못다이룬 의료사업을 성취하기로 결심하였다. 감리교의 여성해외선교회는 로제타를 보구여관에서 일하도록 했다.

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그녀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열심히 일해 아내의 학업을 도왔다. 그러다가 낯선 이국생활과 과로로 폐결핵에 걸렸으며 에스더의 지극한 간호의 보람도 없이 1899년 그녀가 졸업반일 때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1900년 마침내 에스더는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남편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안은채 귀국했다. 열강이 각축하고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며 점차 침략야욕을 노골화 하던 구한 말. 개화의 물결을 타고 종로에 처음으로 전등이 시설되던 그 해에 그녀는 돌아왔다. 그녀는 로제타가 진료활동을 하고 있는 보구여관에서 로제타와 함께 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에스더는 자신을 키워준 보구여관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10년간 매년 5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또한 평양부인병원을 비롯해 평안남북도, 황해도의 산간벽지를 돌면서 조선의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강연을 통해 위생관념의 개선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맹인들을 위하여 로제타가 도입한 점자교육에도 힘썼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에스더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마치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우리집에 함께 살았다. 그녀는 감미롭고도 선율적인 목청을 갖고 있었다. 저녁에는 내게 소설이나 시를 낭송해 주곤했다.

1909년 5월 28일은 '우리들의 의사'로 불렸던 에스더에게 있어서 특별한 날이었다. 여성교육협회(Woman's Educational Society)와 여성기획협회(Woman's Enterprises Society) 공동으로 조선최초의 대학졸업여성으로 문학사였던 미세스 하와 의사 박에스더에게 표창장을 주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거행된 이 식에 참석한 에스더는 금메달을 받았다. 에스더는 가슴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영광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일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에스더는 폐결핵에 걸려 투병중이었는데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요양원과 같은 시설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병원과 성경학교에서 봉사하다가 1910년 1월 13일 34세의 아까운 나이에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내게 있어서 에스더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할 수 있는 가장 황금기의 인생을 맞고 있었던 에스더, 그녀를 이 세상에서 앗아갔고 그녀가 사랑한 수많은 동족들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요양원을 세우기로 굳게 맹세했다."
 
이렇듯 박에스더의 비극적 죽음은 셔우드 홀로 하여금 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을 만들고 크리스마스씰을 발행하여 항결핵운동에 헌신하도록 인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핵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1926년 다시 조선에 돌아 왔으며 마침내 그의 꿈은 결실을 보았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구세요양원 개원식날 그는 테이프를 끊으며 "나는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는 조선의 고통받는 결핵환자들을 위해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박에스더 같이 비참하게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가슴벅찬 감회를 토로했다.

결핵으로 비명에 간 박에스더의 죽음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근대적요양원의 탄생과 항결핵운동의 태동을 가져온 고귀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과학기술부에서는 국가발전과 국민복지 향상에 기여한 과학기술인을 엄선해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해오고 있는데 박에스더는 2006년 11월 16일 이 명예의 전당에 열아홉번째로 헌정되었다.

질병치료를 주로 한의학과 민간요법, 무속에만 의존했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미국의 정규 의과대학을 졸업한 한국최초의 여의사로서 그녀가 남긴 빛나는 발자취는 우리나라 의학사 뿐만 아니라 여성사와 과학사에도 길이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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