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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업계 이해 우선하는 민간보험은 경계해야"
시론 "업계 이해 우선하는 민간보험은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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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1.2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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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석(서울의대 교수·의료관리학)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나라꼴을 갖춘 나라치고, 공적 의료보장제도만으로 모든 국민의 의료서비스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우는 없다. 국영의료를 운영하는 영국이나 북유럽 국가조차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간의료보험이 국민의 다양하고 고급화된 서비스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당연히 민간의료보험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서구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차이점은 있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고급화된 서비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민간의료보험이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은 다양하고 고급화된 서비스는 고사하고 중병으로 인한 치료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중증질환에 대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고액 중증질환으로 인한 가계 파탄은 끊이질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너도나도 월 보험료가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수십만원이나 하는 민간의료보험 상품을 구매하고 있다.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민간의료보험은 이미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민간의료보험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다. 민간의료보험을 없애야 한다는 극단론이 제기되는가 하면, 그 정반대 편에서는 건강보험을 해체하고 우리나라 의료보장체계를 민간의료보험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또 다른 극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천문학적 규모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전혀 무용하다는 주장도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후자의 극단론도 마찬가지다. 호불호를 떠나, 건강보험은 지난 30년 동안 국민의 일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론 의료계 못지않게 국민들도 건강보험에 대한 불만이 많다. 그러나 건강보험 해체라는 주장에 직면하게 되면 말이 달라진다. 대다수 국민 불만의 요지는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지 '건강보험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목소리 큰 극단론에 합리적인 주장이 묻혀버리는 것은 보건의료 부문도 매 일반이다. 민간의료보험이 처한 상황이 딱 그 모양이다. 민간의료보험을 둘러싼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당사자들이 '호불호' 혹은 '찬반'과 같은 원칙적이고 극단적인 태도와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의미 없는 말잔치만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민간의료보험에 대해 '찬성한다' 혹은 '반대한다'는 편 가르기는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떤 개인 혹은 집단이 민간의료보험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민간의료보험은 이미 현실에서 물적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나름의 시장 질서를 통해 확대와 쇠퇴의 순환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적이거나 현실과 유리된 극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현실적인 '판단'과 '선택'이 필요하다. 즉, 어떤 민간의료보험인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의료계의 경우, 민간의료보험에 대해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많은 듯 하다. 건강보험에 대한 그간의 누적된 불만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민간의료보험이라고 해서 무작정 덮어놓고 반길 일은 아니다. 어떤 민간의료보험이냐에 따라 국민과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이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의료접근성과 다양한 서비스 욕구를 충족시키고, 의료공급자의 진료 자율성을 확대하는 민간의료보험이라면 쌍수를 들어 반길 일이다. 그러나 보험사의 이익 증대에 치중하면서 국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별로 없고, 오히려 의료공급자를 더욱 옥죄는 민간의료보험이라면 승냥이를 피하려다 범을 만나는 격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현행의 민간의료보험은 국민과 의료계에게 그리 좋은 상품은 아닌 듯 하다. 매년 7~8조에 이르는 민간의료보험 보험료를 내고 있지만, 과연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국민과 의료계에 돌아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복잡한 상품 설계와 부실한 정보 제공으로 인해 의학적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국민이 소비자로서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도 큰 문제이다.

새정부가 들어서면, 그 동안 유보되었던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정책 판단이 곧 이루어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수위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관련 정황들을 살펴보면, 국민과 의료계보다 보험업계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 판단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소비자 보호에 관련된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민간보험사가 건강보험이 보유한 개인 의료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식의 규제 완화에 대한 논의만 이루어지는 듯 하다. 예컨대, 의료법 전부개정안에서는 민간보험사와 의료기관 간의 비급여 가격계약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다 보험업계는 한 발 더 나가서 의료기관에 대한 선별계약 허용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런 보험업계의 요구가 그대로 수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의 동네의원과 상당수의 지방 중소병원은 민간의료보험의 계약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 자명하다.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과 의료기관 간의 계층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국민 의료수요의 양적 증대와 질적 다양화, 그리고 건강보험의 재정 한계로 인해 민간의료보험의 시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에 따라 국민의 의료이용과 의료계의 진료 여건에 미치는 영향력도 한층 커질 것이다.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섬세하고 신중한 설계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꼼꼼히 따져보지 않은 채, 섣부르게 민간의료보험을 활성화 한다면, 민간의료보험이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모순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간의료보험'이 아니라 '좋은 민간의료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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