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진(단국의대 영상의학과)
"정상이 아니라도 좋다" 무상념의 미덕
칼라파타르 트레킹을 일주일 가량 앞둔 16일 서경진 단국의대 교수(영상의학과)는 사뭇 설렌 표정이었다. 그는 24일부터 2주간 해발 5545m의 칼라파타르에 오르는 중이다. 칼라파타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400m)보다도 높은 곳이다. 비록 에베레스트 정상(8848m)에는 못미치지만 위험하고 고된 길이다. 대학에 매인 몸이라 휴가를 오래 내기 힘들어 설이 낀 기간을 택했다. 최근 2년간 대한근골격영상의학회장을 맡아 상대수가 등 현안과 씨름하면서 지친 몸을 재충전할 좋은 기회라고 했다.
고산트레킹은 정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을 말한다. 서 교수는 '여유롭게 산을 조금씩 산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지난 2005년 12월 히말라야의 안나프루나 베이스캠프(4130m)에 올랐다. "움직이지 않으면 추위가 피부를 뚫고 뼈속을 노리더군요. 주위의 깊은 협곡과 만년빙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열흘만에 세수 "더 버틸수 있는데…"
고산트레킹을 하면 씻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있다. "안나르푸나에서는 열흘만에 처음으로 세수를 했어요." 이어지는 멘트. "한 열흘은 더 참을 만한데 이제는 매일 목욕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더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는 '킬리만자로'(5895m)를 꼽았다. "2005년 1월이었습니다. 밤 12시에 출발해서 오전 6시30분쯤 해뜨는 것을 보며 계속 걸었죠. 정상에 선 게 오전 10시, 고소증 때문에 천천히 내려오니 저녁 7시더군요. 19시간동안 내리 걸은 셈이죠."
킬리만자로는 아마추어 트레커에게는 꿈으로 통한다. "'뽈레 뽈레'('천천히 천천히'라는 의미의 아프리카어) 걸었습니다. '뽈레 뽈레' 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는 게 킬리만자로입니다. 킬리만자로는 높고 험한 기후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산이 아닙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면 누구나 오를 수 있고 용기와 시간을 내어 시도하면 다녀올 수 있습니다."
고산트레커가 된 계기를 물었다. "원래 등산을 좋아했는데, 10년 전쯤 운동을 하다가 오른쪽 발목의 뼈가 깨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거골 연골골절(Talus Osteochondral Fracture)였어요. 발목이 돌아가는 운동은 못하게 돼 골프와 테니스 등을 접었죠. 문득 '언제 못 걷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자고 결심했죠."
1980년 경북의대를 졸업한 그는 경북의대 교수로 있다가 개원해 성공한 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 흔치 않은 경력을 지녔다. 의약분업 당시 대구시의사회 법제이사를 맡아 의권쟁취의 선봉에 섰던 열혈의사이기도 하다.
국내의 여러 산을 트레킹을 하던 그가 처음 3000m 이상의 고산으로 택한 곳은 지난 2003년 8월 후지산(3776m). "의대 본과 3학년 병리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일본 학회에 참석하시고 후지산에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교수님의 일본에 대한 자신감과 등반기는 후지산 등반 꿈의 씨앗이 됐죠." 그는 대구시의사산악회의 일원으로 후지산 정상을 밟았다. "일본인들은 후지산을 두고 '한번 도 오르지 않으면 바보이고 두 번 오르면 더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더 바보가 되더라도 또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산이 후지산입니다."
그는 2004년 백두산 천지 서파(서쪽능선)와 북파 종주에 이어 2005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최고봉인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4101m) 정상에 올랐다. 이밖에도 지난해에는 천안시 에베레스트 등반대회 팀닥터를 맡기도 했다. 당시 팀원 10명 중 2명이 등정에 성공해 보람이 있었다고.
산의 매력에 빠진 그에게 가끔 아내가 싫은 내색을 할 만도 하다. 그는 '민주적인' 의사 결정에 따른다고 했다. "같이 갈까, 나 혼자 갈까" 묻는 게 서 교수의 방식.
"고산트레킹은 정상 정복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올라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목표까지 간다는 생각 뿐이예요. 한번 고산트레킹을 하고 돌아오면 절대 다시 안 간다고 생각하다가도 불과 3달이 지나기 전에 병원의 환자 걱정과 경제문제 등의 고민 없이 머리가 텅빈 시간이 미칠듯이 그리워지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