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희(전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물방울을 즐겨 그려 '물방울 작가'로 알려진 김창열 화백. 소나무 사진을 자주 찍어서 '소나무 작가'로 알려진 배병우 사진작가. 이따금 예술가들은 특정 소재에 유독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정덕희 전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은 장미에 매료됐다. 그림을 그리는 의사는 많지만 정덕희 전 부회장에게는 '장미를 그리는 화가'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같은 화가라도 차별화되고 전문화됐다고나 할까. 같은 장미 그림이라고 해도 한 점 한 점의 느낌이 다르다. 장미꽃에 푹 빠진 사람의 작품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
어느 일요일 장미를 만났다
정년퇴임을 6개월여 앞두고 정 전 부회장은 모처럼의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전시회를 들렀다가 장미 그림을 보고 그 자리에서 매료됐다. 얼마나 그 그림이 좋았던지 곧바로 작가를 찾아갔단다. 장미를 자주 그리는 화가로 유명한 이길순 화백은 개인교습을 해 달라는 정 전 부회장의 요청을 거절했다.
"저는 개인지도를 하지 않습니다."
장미 그림을 꼭 배워보고 싶던 정 전 부회장이 거듭 요청한 끝에 교습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날부터 1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으며 6개월간 장미에 몰두했다. 그 장미 그림들을 모아 6개월 뒤 정년퇴임식에서 조촐한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 뒤로 십 년이 넘도록 정 전 부회장은 이름하여 '장미화가'로 알려지게 됐다.
왜 유독 장미일까?
장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욕심을 내는 정물이란다. 그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인데, 꽃잎이 겹겹이 싸여 있는 장미꽃을 제대로 재현하려면 자태에서부터 빛과 그림자를 잘 표현해야 한다. 햇빛에 있을 때와 그늘에 있을 때 장미가 뿜어내는 빛은 천지차이다. 그 오묘함을 잘 살려내야 장미의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잘 살아난다고 한다. 장미를 잘 그릴 수 있는 화가는 풍경화나 어떤 정물도 능히 그려낼 수 있다. 그만큼 장미 그리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어느 일요일 장미그림에 매료돼 장미꽃만 그려온 정 전 부회장은 장미박사가 됐을 정도로 장미를 탐구하고 또 탐구했다. 그의 집을 방문하면 입구에서부터 장미그림이 화사하게 걸려있다. 찻잔도 장미문양이다. 그러한 수백가지의 장미빛깔을 화폭에 담을 때마다 새로운 장미들이 그림으로 다시 탄생했다.
"장미를 보면 색마다 희한하게 이쁩니다. 그놈이 가시가 박혀 있지만 장미 그 자체는 참 아름다워요. 화가로서 장미를 그려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거나, 조촐한 전시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행사를 할 때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작업실에 들어가면 그의 화폭마다 장미꽃이 넘쳐 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멩이에도 장미를 그려넣었다. 문진으로 쓸 수 있도록 작업한 것이란다. 눈으로도 장미의 향기가 느껴지고, 코로도 장미의 찬란한 모습이 감지된다. 꽃내음이 나는 화가다.
장미를 잘 그리려면?
"과학자가 돼야 합니다. 의사가 정확하게 보고 판단해야 하듯이 장미를 그리는 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싶은 장미를 뚫어지게 관찰하고 빛과 그림자를 잘 살려내야 합니다. 빛이 반사되는 부위, 그림자가 생기는 정도를 잘 묘사하면 그림 속에서 장미가 활짝 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