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전화를

친구에게 전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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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3.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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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호(부산의료원 가정의학과 R3)

그렇게 오지 않던 눈이 3월 초에 한 번 왔다. 금방 녹아 버려 아쉬웠지만 눈 구경하기 힘든 부산하늘에 날려 흩뿌려지는 눈발에 한 참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인기척에 옆을 보니 노인병동 치매 할머니도 계속 병동라운지 큰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과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지 않아 곁에 서서 눈 구경을 함께 했다. 눈 구경을 하다보니 겨울인줄 알았다.

병동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보니 약간 덥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사까지 겹쳐 목이 간질거린다고 호소하는 노인분들이 평소보다 많아졌다. 봄이 오나 보다.

봄소식만큼 반가운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때 문학청년을 꿈꿔 자신의 습작을 친구들에게 나눠 주던 꿈 많던 친구였다. 공대 졸업하고 임시직 직장을 다닐 땐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늦은 공부를 하려하기에 더욱 멋져 보였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대학생이고 나는 재수할 때, 그 친구가 백수이고 나는 의대 예과생일때 자주 만났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들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막걸리도 마셔보았고, '젊은 날의 초상'을 흉내 내며 자아를 찾아 볼까 여행도 같이 갔다. 자욱한 술 냄새가 깔려있는 학사주점에서 짜증나는 정치판 얘기라도 나오면 현실의 대안은 없는가라고 서로의 주장을 혀 꼬이는 소리로 토해내기도 했다. 추억도 되지 않는 기억의 한토막이다. 이제 친구는 전공과 상관없는 대형마트에 취직해 힘겹게 살아가고 나는 '달콤살벌'한 병원에서 더 힘들게 버티고 있다.

가끔 내 생각이 나는지 일년에 한두번 자정 훨씬 넘긴 시간에 전화를 걸곤 합니다. "어딘가 전화하고 싶은데 전화 할 곳이 없다. 니는 이 시간에 아직 안자고 있을 거 같아서 전화한다"면서. 엊그제도 자정을 넘겨 전화를 했다. 근데 다른 때와 달리 "병원 생활하는 니가 부럽다. 행복할거 같다"는 얘기를 했다.

아마 친구는 흰 까운 입고 일하는 피상적인 모습이 생각났는가 보다. 통화 후 계속 잔상이 남았다. 친구가 부러워 할 만큼 난 잘살고 있는가, 행복한가.

의대 입학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졸업하기까지 겹겹이 서있던 시험과 실습들은 이제 미소 지으며 돌아보게 된다. 인턴만 버티자, 레지던트만 되면.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지친 몸을 이끌고 환자 한명 더 보려하는 선배들을 만나도, 어떤 술기가 자신에게 더 도움 될지 고민하는 동료들, 다른 거 생각 않고 냅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후배 의대생들을 만나도 뭐가 부러워 할만한 것인지 답답하기까지 하다.

주말 비번때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간만에 술잔 기울이며 얘기나 나누려고 한다. 힘들게 살아가는 이 사회,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고민 많고 방황하고 싶은 상황이 있을 때도 많다. 하지만 더 나은 의사가 되려하는 꿈에 다가가는 건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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