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5:21 (금)
"내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돕는다"
"내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돕는다"
  • 이현식 기자 hslee03@kma.org
  • 승인 2008.03.24 10:32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명호 아시아농촌의학회 명예회장

나이로 본 김명호 교수의 삶과 업적

Before 65
- 연세대 원주캠퍼스 설립 지휘, 보건대학원장 역임

From 65 Until 77
- 2년 준비 후 10년동안 네팔서 의료봉사, 병원·보건대학설립


Thereafter          
- 병원 CEO 및 산업의학센터 소장, 아시아농촌의학회 명예회장,
   외국 보건대학원 설립 등 전공분야 자문, 강연회 등 참석 요청  쇄도

지난 2월 24일 인도에서 열린 제11차 아시아농촌의학회 학술대회에서 김명호 전 연세의대 교수가 명예회장에 선출됐다.

정년퇴임 후에도 현역 못지 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 교수의 근황이 궁금해 인터뷰를 청했다. 13일 고양시 자택에서 만난 그는 강연 원고 집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명호 교수는 지난 1984년부터 아시아농촌의학회 이사로서 학회 일을 맡아오다가 이번에 명예회장에 올랐다. 김 교수는 취임 인사말에서 농촌의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작고한 일본 와카스키 박사를 추모해 각국 참석자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학회에 함께 참여한 임현술 한국농촌의학·지역보건학회장(동국의대 교수)은 "당시 김명호 교수님의 취임 기념사를 듣고 후학으로서 너무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이어 "네팔에서의 오랜 활동으로 인도 문화에 익숙한 김명호 교수가 학회 참석자 33인의 훌륭한 가이드역할까지 해줬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 교수는 농촌의학·지역보건학회 1300여명의 회원들 간 상호 원활한 연락을 위해 사무국을 위한 장소를 개인적으로 마련할 계획이다.

전공이 예방의학인 김 교수는 매주 목요일 전주예수병원에 가서 산업보건과 관련한 활동을 한다. 전주지역 공장 근로자들의 건강과 작업환경을 살피고, 외국인 노동자를 돌본다. "내 전공분야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 어디든 갑니다." 다만 경제적 댓가를 주는 곳은 완강히 거절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뉴질랜드와 피지 근처의 마누와투라는 지역에 보건대학과 간호대학을 설립한다고 해서 10일 정도 가서 자문을 해줬다.

끊임없는 선행과 봉사로 지난해 연세대에서 '연세를 빛낸 동문상'을 받았고, 모교인 경북대에서 '안행대상'을 수상했다.

김 교수는 매일 중요한 일을 일지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메모광이다. 기자에게 보여준 일지를 보니 최근 인도 아시아농촌의학회장에 다녀온 일은 물론 수년간의 활동이 빼곡히 적혀있다. 김 교수는 관심 있는 영문기사도 스크랩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뜻을 모르는 단어 하나가 나와 사전을 찾아봤다"고 했다.

김 교수는 광주서중(광주일고의 전신)과 대구의학전문학교(경북의대의 전신)를졸업하고 1954년 한미재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네소타주립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1956년 귀국 후 서울의대 강사로 재직하면서 학교보건과 보건교육 강의을 맡았으며, 서울대 보건대학원 창설 준비에도 힘썼다.

1957년 연세의대 위생학교실 강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연세대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1981~1983년 연세대 원주캠퍼스 설립 책임자로 부임해 의대를 포함한 4개 대학 창립과 발전을 도맡았다.

"원주에 연세대 캠퍼스를 세운다고 해서 토요일마다 총장님과 함께 들판을 돌아다녔죠. 묘 180개와 115가구를 이전해야 했는데, 지주들을 모아놓고 소주잔을 나누면서 설득한 덕에 상당히 저렴한 비용으로 해낼 수 있었어요."

이후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으로 활동한 뒤 1989년 정년퇴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제2막이 오른다. 한국의료선교협회에 2년간 몸담은 뒤 네팔로 떠났다. 1991~1997년 네팔 돌카지역에서 가우리샹카병원을 창설하고 초대원장으로서 환자 진료와 지역사회 보건사업에 주력했다. 1998~2001년에는 국립바랏트풀 보건대학을 세웠다.

"네팔에서는 코란도를 앰뷸런스로 개조해서 3000m가 넘는 고지 절벽을 돌아다녔어요. 하루에 버스가 2대 다니고, 국제전화를 하려면 8km를 걸어야 하는 오지였죠." 그는 의료혜택이 절실했던 네팔에서 무료봉사는 물론 병원과 보건대학 설립 등 보건의료 인프라를 구축해 '밝은 미래'까지 선물했다.

김 교수는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네팔에 다녀온다. 둘째 아들도 아직 그곳에 있다. "네팔 사람은 사귀면 사귈수록 쫄깃쫄깃한 맛이 있어요. 손재주도 좋지요."

2001년 네팔에서 10년간의 의료·교육사업을 마친 후 귀국한 그는 안양메트로병원과 샘안양병원에서 산업의학연구소장을 맡아 산업장 환경보건과 근로자 건강관리에 매진해오고 있다.

그는 불광동의 은광교회(목사 이동준)에 52년째 다니고 있는 독실한 신자다. 그의 장남은 목사이면서 기독교와 관련한 음악을 300곡이나 만든 작곡가다.

19년 전 대학 캠퍼스를 떠난 김 교수에게 앞으로 정년을 앞둔 '젊은' 교수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뭔가 새로 배우지 않더라도 현재 가지고 있는 실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어요. 나는 1989년 퇴임 후 2년간 준비를 한 뒤 네팔로 떠났어요.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언어문제요? 단어 1000개만 외우면 진료할 수 있어요."

네팔은 우리 돈으로 2000원만 내면 하루 종일 골프 칠 수 있고, 손도 안 댄 광맥이 넘쳐나는 곳이란다. 김 교수는 "한국 의사들의 국제적 위상이 몰라보게 올라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음만 먹으면 강연회·자원봉사 등 할 게 넘쳐요. 집에서 빈둥빈둥하면서 마누라와 싸울 일 없죠. 괜히 나가서 구부정하게 앉아있지 마세요. 퇴임 전 미리 준비하면 더욱 좋겠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네팔의 보건대학 교수들에게 사택을 지어주려고 해요. 내가 120살까지 살겠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100살로 디스카운트를 했어요(웃음). 14년 남았는데, 하려고 생각해 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국적과 인종을 떠나 다른 이를 위해 오랫동안 자신을 희생하고 싶다는 김 교수의 숭고한 정신이야말로 후학들이 되새겨야할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학 력---------------------

1945          대구의학전문학교(경북의대 전신) 졸업(의학사)

1954~1955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보건대학원졸업(보건학 석사)

1961~1962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보건대학 원 수료(보건학 박사과정 1부)

1963~1965 연세대학교 대학원 의학과 졸업(예방의학 박사)

약 력----------------------

1946~1952  전남 광양에서 개원
1957~1989  연세의대 교수
1981~1983  원주연세의대 초대 학장
1983~1987  연세대 보건대학원장
1991~2001  네팔 의료선교사
                 (바랏트풀 보건대학원장 등 역임)
2001~2004  안양메트로병원 산업의학연구소장
2004~2005  샘안양병원 산업의학센터 소장(자원봉사)
2006           선의노인전문병원장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