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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의 산타클로스 권경철 박사
강원도 화천의 산타클로스 권경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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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4.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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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섭(조선일보 논설위원)

매년 크리스마스 날이면 동네 어귀에 산타클로스가 나타났다. 흰 수염을 단 그는 선물이 한아름 담긴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신문 배달 소년이나 남의 집 살이를 하던 빈곤한 아이들은 장갑이나 목도리 같은 선물을 받았다. 과자도 있고, 알사탕·초코렛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혼자 모든 선물을 마련했으나 차츰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리어카 선물은 더 풍성해졌다. 강 건너 보육원에도 그의 선물은 배에 실려 보내졌다. 하모니카로 멋지게 '징글벨'을 부는 그의 뒤에는 언제나 동네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매년 크리스마스날이면 어김없이 동네 시장 어귀에서 시작해 군인극장·교회·둑 밑을 지나는 그를 보고, 동네 아이들은 산타클로스가 정말 있다고 믿었다. 눈이라도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날이면 빨간색 산타클로스 복장이 더욱 돋보였다. 6·25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이 산타클로스는 뒤를 쫓아다니던 초등학생들이 50대에 가까워질 때까지 계속됐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에서 40여년에 걸친 산타클로스 얘기다. 산타클로스는 바로 동네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의사 권경철 박사였다.

서울의대를 나와 6·25전쟁 중에 군에 입대해 화천에서 야전병원 외과과장을 했다.

함경도 '아바이'출신인 그가 제대한 뒤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군수와 서장이 급히 찾아왔다. "제발 한해만 더 있어 주세요. 선생님이 가시면 누가 환자를 치료해요." 그도 차마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전쟁 직후라 화천은 지뢰가 터져 팔·다리가 잘려 수술을 받아야 할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네에 기껏해야 수의사 밖에 없던 시절이라 민간인들은 툭하면 군부대 병원으로 실려왔다. 그는 동네에 흰색이 칠해진 단층 건물에 '권의원'을 차렸다. 누구나 못살던 시절인지라 치료를 받고도 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감자를 쪄오거나 쌀을 갖고 오기도 하고, 숫제 외상을 긋고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한해만 있다가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또 다른 한해가 지나가도 떠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없으면 누가 우릴 치료 해줘요"라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 때는 지금처럼 환자들이 병원에 오는 것이 아니라 환자 집으로 가서 치료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진가방을 든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오토바이가 나오면서는 이를 타고 다른 면지역까지 왕진나갔다.

동네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는 그에게 때마다 '국회의원'출마를 부추겼지만,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안경을 쓴 그는 교회 장로로 열심히 봉사했다. 맹장수술부터 애 받는 산파 일까지 두루 진료하는 동네의원이었고, 할아버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동네사람들의 주치의 노릇을 했다. 이런 그에게 보령제약에서 강원도 산골지방의 슈바이처라며 큰 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수년 전 병원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남을 돌볼 처지가 되지 않았다. 그가 화천을 떠나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간다고 하자, 동네사람들은 몹시 서운해했다.

노년이 되어 은퇴해 떠난다는 의미보다 우리 시대 살아있는 산타클로스가 막을 내리는구나 하는 아쉬움이컸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화천에 살았던 아이들에게 그는 아직 동화속 산타클로스로 40년째 가슴 속 깊숙히 간직돼있다.  ds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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