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21:36 (금)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요양보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요양보험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4.28 10:12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수(중앙일보 기자)

올해 생신이 지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어느 새 어버이날이 다가오는데도 아직 찾아뵙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생전에 그렇게 예뻐하시던 '기자 손녀'는 5년 전 당신이 돌아가신 뒤로 겨우 두 번 찾아뵈었다. 서울서 멀지 않은 곳, 파주 용미리 추모의 숲 어딘가에 계신 할머니인데…. 올해도 할머닌 활짝 핀 꽃들 사이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고 계실까. 불편한 다리 때문에, 나중엔 정신마저 오락가락 하시는 바람에, 10여년을 그렇게 집 안에만 계셨던 할머니. 그래서 당신을 평생 모셨던 맏며느리의 주장대로, 관 속에 갇혀 지내시는 대신 훨훨 날아다니실 수 있는 그곳으로 모셨던 건데….

가게 일로 바쁘셨던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는 우리 3남매의 어린 시절을 내내 함께 해주셨다. 친구들이 우리 엄마로 착각할 만큼 육순이 넘어도 고운 자태를 간직하신 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독대 계단 등에서 두어 번 낙상을 하신 후유증은 일흔을 전후해 급격하게 진전이 됐다. 언제부터인가 일어나고 걷는 일조차 힘들어지셨다. 그래도 워낙 깔끔하신 양반이라 씻고 옷 갈아입는 일, 심지어 방 청소까지도 어떤 식으로든 기어코 당신이 직접 하셨다. 하지만 그 외엔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이웃에 사는 친구가 놀러오면 화투를 치는 게 유일한 낙이셨다.

그 와중에 정말 고생하신 건 맏며느리인 어머니였다. 시골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동생들을 업어 키우기까지 하다가, 7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와서는 남편 가게 일 돌보랴 시동생들 뒷바라지 하랴 3남매 낳아 키우랴 하루도 쉼 없이 지내셨던 내 어머니. 가게에 있다가도 끼니때면 시어머니 식사를 챙겨드리러 얼른 집으로 달려오고, 시어머니 친구들을 위해 틈틈이 간식도 차려드리느라 자그마한 몸집의 어머니는 더욱 야위어가셨다. 게다가 할머니는 집안에 흐트러진 것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당신이 직접 치우지 못하는 답답함을 며느리에게 잔소리로 쏟아내기 일쑤셨다.  

우리 가족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 건 치매 같은 증상이었다. 가게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한 직후였다. 이사를 하고도 집안 청소 하나 맘껏 못한다는 스트레스가 할머니를 강하게 압박했나 보다. 엉뚱한 고집을 피우시는 건 예사고, 몇 십 년 전 일을 들먹이며 매일 며느리 트집을 잡으셨다. 어머니가 속상해 혼자 몰래 눈시울을 적시는 걸 보며 얼마나 할머니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던지….  다행히 할머니 상태는 몇 달이 지나자 곧 좋아지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1년 전쯤 건강이 악화되면서 다시 이상해지셨다. 어머니 외엔 다른 며느리들도 못 알아보실 정도가 됐다. 어머닌, 아버지가 가게를 정리하신 뒤에도 그런 할머니 간병에 외출 한번 맘 놓고 하실 수 없었다. 기저귀를 차고 침상에 누우신 지 몇 달 만에 할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친정어머니보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시어머니의 죽음 앞에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릴 만큼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어머니가 그 힘든 간병생활에서 겨우 벗어나시게 됐다는 홀가분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여든 다섯에 증손자들까지 보고 돌아가셨으니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 며 할머니께 감사할 정도로….  7월 1일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작된다. 국민이 보험료를 조금씩 내서 노인성 질환자들이 있는 가정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다. 지난 15일부터 서비스 신청을 받고 있다. 아직은 혼자 거동을 거의 못하고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 지내다시피 하는 치매·중풍 환자만이 대상이다.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치매 증상과 함께 침상에 누우신 건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일 뿐이었으니, 우리 어머니에겐 요양보험도 '그림의 떡'이 됐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왕 시작하는 것만큼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일본 등 선진국의 전례를 잘 참조해 각 가정의 수요파악은 물론, 요양시설과 재가서비스 요원들에 대한 질적인 관리, 의료서비스와의 연계 등에 있어 시행착오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한 단계, 한 단계, 대상자도 늘리고 서비스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새삼 할머니 젖가슴이 그리워진다. 5월엔 용미리 추모의 숲에 아이들을 데리고 꼭 찾아뵈어야겠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