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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06:00 (금)
"아직 꿈꿀 수 있는 열정이 있다"
"아직 꿈꿀 수 있는 열정이 있다"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08.11.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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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학문화상' 받은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

老교수는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책상머리에 앉는다.그는 1925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넷이다. 

여느 경우라면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며 젊은시절 열정을 그리워하다가 추억속 한 순간 한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나면 그 반가움에 남은 하루를 행복해하며 지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혹은 탈없이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가족들의 염려속에서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편안하고 안온한 시간을 보내다가 시나브로 잠 속으로 빠져드는 그림이 익숙하다.

그러나 노교수에게 그 때부터 네다섯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성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앉은 책상 앞에는 아무도 없다. 책 몇 권만이 눈앞에 널려있을뿐. 오늘 상대할 그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기에 그의 열정은 아직 사그라지지 못한다.   국내에 법의학을 학문으로서 되살리고 지금의 위상에 이르기까지 일궈온 그가 만년에 꾸는 꿈은 무엇일까?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
'사람에 있어서는 생명이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권리도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된 민주국가에서만 그 학문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 나라의 문화정도나 민주화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 법의학의 발달 정도로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의 법의학자 후루하다 다네모도(古畑 種基)가 지은 <法醫學の 話>에 나와 있는 말이다. 대학 3년생이던 문 교수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마주하게된 그 책의 '사람의 생명보다도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라는 한구절에 마음을 뺏겨 법의학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 법의학 연구를 위한 국내 여건은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광복 후 미국의학이 들어오면서 미국의 의대에는 법의학교실이 없다는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 의대에서도 법의학 강의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미국에는 사회적으로 법의관(Medical Examiner, ME)제도를 통해 변사에 대한 전적인 처리권한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즉 ME를 사회제도로 두어 대학단위의 법의학이 아니라 국가수준의 법의학이 실생활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다.

의협신문 김선경

지금도 세계 각국 가운데 영미법을 택한 나라는 국가적인 ME제도를 시행중이고, 대륙법을 택한 나라는 의과대학에 법의학교실을 두고 있다. 문 교수의 법의학자로서의 내디딘 발걸음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창설멤버, 고려의대 법의학교실 창립, 대한법의학회 창립 등 대부분이 처음인 경우였다.

이후 문 교수는 법의학이 다른 학문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나름대로의 지식을 정립하고 학제간 경계를 확실히 해야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한다.

검시에 필요한 지식과 생명윤리 및 안락사 등에 관한 법의지식, 수사관들의 과학수사에 필요한 법의지식, 중독사 판단에 필요한 약해(藥害)지식, 진료과실 여부를 가리는데 필요한 의료법학 부분 등에 17권의 전문서적과 실제 사건을 다룬 법의학 교양서 14권이 남아 있다.

또 다른 길…새로운 길
평생을 법의학자로서 일가를 이룬 문 교수가 1990년 학교를 은퇴한 이후 마음을 붙잡힌 곳이 있다. 바로 'Book Autopsy'이다. 책을 부검한다? 문헌 속에 나타난 예술작품·대문호·음악가·화가·조각가 등에 대한 기록을 과학적·의학적으로 분석하며, 왜곡되게 그려진 인물상과 작품에 대한 해석 오류 등을 밝히는 것이다. 

법의학을 통해 침해된 인권을 바로잡는다면 이는 살아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 죽음을 맞은 역사속 인물에게도 해당된다. 또 그들에 대한 문헌이나 예술작품 등이 남아 있는 경우라면 이를 근거로 그 사인이나 질병과의 관계를 구명해 혹시 잘못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는 것 또한 법의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문 교수는 러시아 음악가 차이코프스키를 예로 들며 콜레라 때문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문헌조사결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제정 러시아 황제가 내린 사약으로 인해 사망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신의학에서는 대문호나 장인의 작품에 대한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병적학(病跡學·Pathography)'이라고 한다. 최근 정신의학과 문학.예술을 접목시킨 일종의 Fusion Science로 각광받고 있다.

문 교수의 관심은 바로 이 병적학에 법의학을 접목시킨 '법의병적학(法醫病跡學·Medico-Legal Pathography) 분야에 쏠려 있다. 그리고 법의병적학을 구현해 나가는 동력이 바로 'Book Autopsy'다. 이와 관련한 저서도 벌써 12권에 이른다.

문 교수는 최근의 저서 <그림으로 보는 신화와 의학> <미술과 범죄> <표정의 심리와 해부> <질병이 탄생시킨 명화>를 통해 예술과 과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며 독자에게 인식의 전환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그림으로…>에서는 신화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 과장되었지만 메시지가 녹아있는 미술작품을 의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신화의 예술성과 과학성을 연계하고 있고, <미술과…>에서는 억압 콤플렉스를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나 조각가들을 통해 그들의 패배의식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포악성을 폭발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작품을 법의학적으로 고찰했다. <표정의…>에서는 거장의 미술작품 가운데 얼굴표정이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 미술해부학적 지식과 감정이 표정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생리학적으로 분석했고, <질병이…>에서는 화가의 질병과 작품의 관계를 구명하기 위해 거장의 전기와 병적기록까지 조사한 자세한 자료를 내놓으며 질병이 걸작탄생의 주요 역할이 된 작품에 대한 설명도 이어간다. 

식지않는 열정을 기다리며…
문 교수는 3일 교육과학기술부가 시상하는 '대한민국과학문화상'을 받았다. 물론 그동안 문 교수가 펼쳐온 예술과 과학, 혹은 예술과 의학을 접목시킨 여러 작업들에 대한 평가이다.

문 교수가 평생 한 길을 걸으며 못내 아쉬운 것은 전국 의과대학 가운데 13곳에만 법의학교실이 개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죽기전에 모든 의대에 법의학교실이 개설되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소원이오." 문 교수는 법의학을 바라보는 의사 사회의 시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사회가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사회와 국가가 바뀌는 것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인간 권리에 대한 요구가 다양해지는 만큼 법의학과 관련한 학문 영역도 폭넓어져야한다는 문 교수. 무궁무진한 연구대상 앞에 노교수는 그의 열정을 이어갈 후학을 기다리고 있다. 내일도 새벽 3시이면 그의 서재엔 다시 불이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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