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신문 지음/대한의사협회 100주년위원회 펴냄
살아가다 문득 곁을 둘러본다. 그럴 때면 밥벌이에 묻혀 허덕이고 있는 나를 보게 되고 세상살이 덧없음에 빠져든다. 삶의 방편이 되어야할 것들에 모든 것을 붙잡혀서 부대끼며 힘들어하고 간혹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는 모습도 있다. 인생이란 워낙 그런 것일까? 아닌 경우도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의협신문에 연재중인 '의사 백인백색'이 한 데 묶여 <백인백색>으로 나왔다.
여기 여든 여덟가지 삶이 있다. 진료실 안팎의 쉽지 않은 일상 가운데 어떻게 이런 화려한 외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인생을 꾸미고 가꿀수 있는 여유다. 거개는 "나도 한 번 해보리라" 마음속 재잘거림을 외면하고 잦은 핑계와 게으름으로 뒤로 미루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다. 이 곳에 펼쳐진 삶은 새로운 것을 외면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와 대상을 향해 알고 배우고 익히며 좋아하게 되고, 결국 즐기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
'깨끗한 붓 하나'의 흔적인듯한 '백인백색'이 새겨져 있는 잘 꾸려진 양장본 표지를 넘기면 만나게되는 이 책의 차림표에는 여든 여덟 사람의 작은 세계가 정갈하게 옮겨져 있다.
들머리에는 고수(鼓手) 천희두가 북채를 잡고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고수라는 역할을 무대의 조연에서 주연으로 끌어올리고 지금도 '곰삭은' 소리를 찾아 국악의 제맛을 알리는 그의 깊은 속내가 나타난다. 이후로 '검의일체(劍醫一體)' 검도 7단(김한겸)·'풍월당' 주인장이자 고전음악 전도사(박종호)·의료계 이창호를 꿈꾼다(문민주)·사랑하는 나비야(주흥재)·골프를 말하다(박만용)·돈이라면? 화폐수집 마니아(정태섭)·춤 치료 아세요?(김현식)·도기에 빠진 박물관장(이정복)이 이어진다.
영어·일어·프랑스어 뿐만아니라 라틴어·희랍어·수메르어·이집트상형문자·산스크리트어까지 섭렵중인 여인석은 가히 언어의 천재가 아닐까? 내년이면 그가 번역에 열중하고 있는 희랍어 '히포크라테스 전집'(10권)을 만날수 있게 된다. 물론 국내에서 처음이다.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김연일)·대한스쿼시연맹회장(옥인영)·'결'의 매력에 빠진 목공예가(김영백)·'대한의사협회' 제자(題字)(박영옥)·낭만적 미성의 테너(박성태)·해녀가 되고싶어요(조윤애)·탁구에 미치다(김병로)·열심히 '찍는' 사진작가(박상윤) 등의 혼 깃든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카누와 카약을 즐겨하고 의대 교수보다 수상스포츠 전문가로 더 잘 알려진 김 찬은 틈만 나면 배를 띄울 궁리뿐이다. 초등학생인 자녀들과 함께 동해안부터 서해안까지 일주를 계획중인 그는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 의사 그림쟁이를 모으는 회장님(김정일)·골 맛을 아는 축구대표팀 팀닥터(임영진)·명품 '동광'란(蘭) 탄생 주역(이원기)·정성으로 그리는 '민화'(한미애)·마라톤에서 배우는 인생(이동윤)·'음반수집' 대가(정정만)·커피칼럼니스트(유필문)·태극권 달인(최환석)·의사테니스계 명인(박석산)·뮤지컬을 제작하는 종합예술인(구 용) 등은 마니아의 경지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이런 의사도 있다. 자개 위에 옻칠을 해서 만들어낸 전통공예품인 나전칠기의 명성과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문두. 그의 꿈인 나전칠기박물관 건립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문화유산이 세계에 알려질 날을 손꼽아 기다f리고 있다. 묵화의 매력에 빠졌다(허인무)·행복한 가위손(유덕기)·와인 박사(김문식)·만화가 꿈 계속된다(박성진)·수석전문가(정종달)·피아노 선율에 사랑 싣는다(박인숙)·마지막 로맨티스트 글쟁이(전용문)·만능스포츠맨(김동호)·자연 담는 사진작가(권영주)·성악가도 놀란 바리톤(유순형) 등에서는 예인(藝人)으로서의 품격이 살아 있다.
'세계적 대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사람이 있다. 세계우표전시회 '전통'·'테마' 부문에서 대금상을 수상해 최고봉에 오른 장세영. 지금까지 세계에서 두 부문에서 대금상을 받은 사람은 그 외에 단 한사람뿐이다. 음대에서 강의하는 의대 교수(김현철)·꿈을 실어 노래하는 가인(이범용)·보이차(茶) 명장(김진우)·고산트레킹 전문가(서경진)·어른들을 위한 동화작가(조현열)·족보 쉽게 풀어쓰는 족보작가(김태준)·현의 마술사(닥터스 스트링콰르텟)·쇼트트랙이라서 아름답다(김종구)·장미 그리는 화가(정덕희)·발레무대에서 탈춤을?(홍영선)·은스푼 수집가(차덕원)·각시붕어 전문가(강석진)·고서 5만권 수집 장서가(문효중)·이웃과 함께하는 재즈피아노(백경권)·흥 있는 기타리스트(문응주)·산사람(조경기) 등은 보는 이들에게 설렘을 불어 넣는다.
물 속을 좋아하고 그 곳에서 사는 생물을 사랑하는 고동범. 수중촬영가를 넘어서서 국내 미기록 바다생물을 찾아 학회에 보고하는 후새류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요즘 그에게는 국내뿐아니라 외국에서도 자료 요청과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절대음원 찾아 진공관 앰프 제작(김호진)·환경운동에 한평생(김경중)·번역전문가이자 북 컨설턴트(강병철)·요들송에 빠지다(박창영)·바람을 가르는 라이더(김원철)·당구 지존(강석태)·플루트 '사랑의 메신저'(임창영)·열쇠고리 만물상(한광수)·자연사랑 환경운동가(안경숙)·동래학춤으로 혼 전한다(손계학)·뮤지컬작가(양혜란)·'삘'충만 음반 프로듀서(이동환)·석문호흡 전문가(이승걸)·'3박물관' 원장(김영균) 등에서는 일가를 이룬 진정한 프로의 세계가 펼쳐진다.
지구를 지키는 의사도 있다. 개인 천문대인 '알비천문대'를 만든 윤홍선. 오늘도 그는 우주의 아름다움 속에 빠져 있다가 혹시 있을지 모를 새로운 소행성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리듬에 묻힌 드러머(신동용)·합기도 고수 팔방미인(한병인)·'닥터박갤러리'로 세상과 함께 한다(박호길)·행복을 꿈꾸는 발명가(이종욱)·댄스스포츠 챔피언(장흥식)·설원 위 나는 스노우보더(이혜원)·추억 담은 접시수집가(정병래)·미술시장서 주목하는 재야 화가(강진화)·앵글 속 자연을 담는다(김영춘)·야생화 찾아 삼만리(신동호)·사회문화운동 하고픈 목공예가(서수영)·독립영화 제작 첫발(주연상)·60세 '몸짱' 보디빌더(박효천)·'입신' 오른 우슈 9단(이동호) 등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다양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잘 차려진 <백인백색>을 마주하며 아쉬움이 한가지 남는다. 여든 여덟가지 다양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 주인공 가운데 김호진·김병로 두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해 이 책을 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셨던 두 분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책 발간에 붙여 다시 한 번 명복을 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
혹시 여러분도 '꽂힌' 곳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첫 발을 떼시는 것은 어떨지?
여든 여덟 분의 삶 앞에서 아직도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02-794-2474·내선 (731, 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