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용 선생님을 회고하며

김영용 선생님을 회고하며

  • 이상완 kyiswl2002@yahoo.co.kr
  • 승인 2009.01.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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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완 대한교통의학회 명예회장·국제교통의학회 동아시아 지역대표 복배

1970년대 이후 고관절수술에 정력을 쏟아왔던 김영용 선생께서 2008년 11월 16일 향년 80세로 타계하셨습니다. 1960년대 함께 일했고 그 후 자주 만났으며 연락해왔던 필자는 깊은 감회 속에 선생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이 땅에서 고관절전치환술의 기초를 닦고 치료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당신의 노력과 업적을 새겨봅니다.

김 선생님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8·15 광복 후 월남하여 의학에 뜻을 품고 서울의대에 입학, 6·25 전쟁을 거치면서 졸업했고, 정형외과 공부를 위해 처음 찾은 곳이 가톨릭의대 정형외과교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형외과 초창기 원로이신 김학현·김봉건 교수님 아래 잠시 수업 후 1958년에 창설된 국립의료원(NMC) 정형외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국립의료원은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3개국에서 설립한 최신의료시설로 외국인 교수들이 진료 및 교육을 지휘하던 국내 최첨단 병원이었습니다. NMC 정형외과에는 한국 측 수석 스탭으로 안병훈 선생님이 활약하셨고, NMC 정형외과 레지던트를 지망했던 필자는 1962년 김 선생님을 처음만나 함께 일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지요. 늘씬한 키와 준수한 용모에 평소 별로 말없이 항상 과묵한 편으로 한두 마디가 전부였으며, 언제나 자세히 들어 새겨야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게 하셨지요. 두주를 불사하는 주량이지만 얼굴색이 변하지 않고, 아무리 술은 드셔도 노래는 절대로 부르지 않으며, 정형외과수술은 출혈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과감하게 빨리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안병훈 선생님을 극진히 모셨고, 후배들에게는 언제나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김 선생님의 형님은 가톨릭의대 소아과 교수로, 장인께서는 의정부 신천의원장으로 당당한 의사집안이었지요. 선생님은 1964년 정형외과 전문의시험 합격 후 곧 NMC를 떠나, 그때까지 정형외과 전문의가 한 명도 없던 부산에서 개원하였고, 몰려드는 각종 질환과 외상 환자들에게 NMC에서 닦은 최신기술을 활용해 많은 찬사를 받았으며, 개원에 크게 성공하여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했습니다.

1968년 필자가 군의관으로 부산국군통합병원에 근무하게 되어 부산에서 다시 재회하였고, 당신께서는 그때 벌서 큰 병원을 신축하고, 명실상부한 부산제일의 정형외과를 운영하고 있었지요. 1970년 영국 Wrightington Hospital Hip Center의 John Charnley 교수에게 고관절전치환술 연수를 위해 출국 결심을 할 즈음 군에서 예편하는 필자에게 당신의 병원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여, 영국에서 귀국할 때까지 병원을 보아드린 것이 또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습니다. 영국유학의 동기는 김 선생님이 개원하는 동안 부산의 아동자선병원 결핵환자 경과를 보살폈고, 그것은 한국 척추결핵환자의 투약보존요법 효과연구를 위해 자주 방한했던 영국 Griffith 교수의 프로젝트와 연결되어, NMC 재직시절부터 알게 된 Griffith 교수를 부산에서 자주 만나 그의 추천에 의해 John Charnley 교실에 입문하게 되었지요. 즉 본인의 결심도 있었지만, 실천의 밑바탕에는 영어를 사용한 NMC 정형외과에서의 경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신께서 귀국하면 병원을 지속발전 시키는데 주력할 줄 알았지만, 개인병원을 키워 편안하게 사는 길 대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에서 고관절전치환수술의 초석을 다질 각오가 이미 확고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개원의로서 보통사람들이 내리기 힘든 중대한 결단이었지요. 

드디어 1972년 부산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경희의대 정형외과 교수로 교단에 들어가 Charnley 저마찰 고관절시술을 우리나라에 보급 확산시키는 선구자적 역할을 시작했고, 그 후 다시 인제대학으로 옮겨 수술과 연구에 더욱 깊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대퇴골두괴사·골성관절염·대퇴골경부골절 등의 적응환자는 물론, 주로 결핵성관절염으로 강직된 고관절 특히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결핵성관절염 치료를 위해 고정수술을 했던 관절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전치환 수술에 열중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실패 혹은 마모된 전치환술의 재수술을 위해 연구영역이 점차 확대되었지요. 인공관절의 피로와 마모를 줄여 내구성 연장을 위한 노력으로 마찰학연구가 불가피했고, 이를 위해 KAIST 기계공학 교수들과 함께 연구했으며, 생체역학 응용으로 고관절수술 내비게이션 체계를 개발했습니다. 197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국제정형외과 및 외상학회(SICOT)가 주최한 인공관절 심포지엄에서 한국대표로 처음 저마찰 고관절전치환수술결과를 발표한 이후 수많은 논문을 국제 및 국내 학술대회와 학회지에 발표했고, 국제적 정형외과수술 교과서 <Campbell's Operative Orthopedics>에 연구업적이 인용되었습니다. 국내활동으로 대한정형외과학회장을 역임하였고, 대한고관절학회의 창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셨지요. 또한 국제적으로 학술 업적이 인정되어 1992년 한국학자로서는 처음으로 회원수가 엄격히 제한된 국제고관절학회(International Hip Society, IHS) 정회원이 되었고, 75명 정원 중 아시아에서 일본학자 한 명과 김 교수님 두 사람만 어려운 관문으로 입성한 것입니다. 그 후 한국의 후학들이 국제고관절학회 정회원이 될 수 있도록 적극 추천 또는 후원해왔습니다. 2008년 1월 선생님의 고관절전치환수술에 관한 지식과 일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료 학자들의 견해를 아울러 집대성한 <고관절외과학>을 저술·출판하였고, 이 책은 앞으로 고관절분야를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할 때 마다 국제인공관절기술학회(International Society for Technology in Arthroplasty, ISTA) 학술대회의 한국유치노력을 꾸준히 해왔고, 그 결과 2008년 10월 서울에서 개최토록 결정되었으며, 동학회의 명예대회장으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려고 준비 하던 중 갑작스런 발병으로 입원수술하게 되었지요.

인생의 중반에 결심하기 힘든 학문의 길에 들어, 굳은 신념과 사명감으로 초지일관 뜻을 이루었고, 작고하신 금년까지 본인의 건강은 돌볼 틈도 없이 수술·강의·국내외 논문발표를 쉬지 않고 계속하였으니, 오직 고관절외과 연구에 열정을 쏟은 일생이었고 실로 고관절전치환수술을 위해 태어난 분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골프 운동은 물론 젊을 때 즐기던 테니스도 시간이 아깝다고 사양하였고, 대신 휴일과 주말을 이용, 자주 전국의 여러 병원에서 요청하는 어려운 고관절수술을 도우셨지요. 평소 항상 그토록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신 당신께서 타계하시니, 과묵한 평소 모습을 볼 수 없음은 물론 함께 수술 할 때의 일화들도 앞으로 나눌 수 없게 되어, 설렌 마음을 진정키 어렵지만, 인명이 재천이라는 하늘의 이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당신께서 고관절전치환수술을 위해 남긴 업적은 이 땅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보존될 것입니다. 하고 싶던 일을 위해 그 길을 가셨고 성취했으며, 또한 집안에는 아들 김승기 원장이 관절치환수술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젠 속세의 잡다한 일과 근심걱정 거두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2009년 1월

대한교통의학회 명예회장·국제교통의학회 동아시아 지역대표

이상완 복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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