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드라마의 한 대사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꿈을 이루라는게 아니야, 꿈을 꾸기라도 하란 말이야."
어릴적 누구나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꿈을 하나쯤은 갖고 산다.
내가 어릴적에는 남자아이들은 대통령, 여자아이들은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꿈을 꿨던 기억이 난다. 나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게 진정 내가 원한 것이었는 지는 지금에 와서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아마도 그건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주 어려서부터 세뇌를 당해서 나의 꿈은 의사인 줄로 알고 살았고, 의사가 아닌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지 못한 채 자랐다.
고교시절 잠시 내가 이과쪽 보다는 문과 쪽에 흥미를 두고 신문방송학과에 가보면 어떨까하고 아버지와 잠깐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지만 막상 의사가 아닌 나의 미래는 상상이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세뇌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꿈을 이룬 셈이다.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자신의 어릴적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면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고…. 사춘기 시절 누구나가 그렇듯 방황의 시기가 있었지만 "가능한 미래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라"는 리차드 바크의 소설에 나오는 한구절을 가슴에 담고 그 가능한 미래를 위해 모든 걸 접어두고 열심히 달려왔다.
그런데 꿈을 이루고 나서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니 왠지 허전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꿈을 이루고 난 지금 이제 또 다른 꿈을 꾸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때는 중년의 사춘기라는 나이 사십 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새로운 꿈꾸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저런 취미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음악과 악기에서 출발해서 좌절을 맛보고 공예와 미술과 언어공부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이렇다하게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욕심만 부리며 지내온 시간들.
돌아보니 아마도 그것은 꿈을 꾼 것이 아니라 방황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적 가난에서 비롯된 문화적인 가난에 대한 수치심과 문화에 대한 목마름의 해소에 불과한.
꿈을 꿀 때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부터 차분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느새 나이가 오십이 되었다. 이제는 진정한 꿈을 꾸어야 할때가 된 것 같다. 방황과 꿈은 다르다. 꿈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내가 어릴적 꿈을 이루기 위해 수십년의 세월이 걸렸듯이 이제 내가 새로 꾸는 꿈을 이루어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준비하고 충분히 노력하는 꿈을 꾸고 싶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나의 삶에 기쁨을 주고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을까.
어릴적 꿈을 이루고 나서 새로이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남은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그 드라마에는 이런 대사도 있었다. 꿈을 그냥 꿈으로 품고 살기만 한다면 그건 꿈이 아니라 그냥 별이라고. 조금이라도 꿈을 이루기 위해 부딪히고 애를 쓰고 하다못해 계획이라도 세워봐야 거기에 자기의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지는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