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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최고의 덕목은 '겸손'과 '부지런함'"
"의사 최고의 덕목은 '겸손'과 '부지런함'"
  • 송성철 기자 good@doctorsnews.co.kr
  • 승인 2010.04.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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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광(성애의료재단 이사장)

"아직까지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서울 영등포 성애병원과 경기도에 있는 광명성애병원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윤광(89세) 이사장이 최근 보건의 날을 맞아 의료계 발전과 복지 향상을 비롯해 한국-몽골 민간외교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 이사장은 "빈 손으로 월남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두 개의 병원이 지역사회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이렇게 과분한 상까지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성애병원을 믿고 찾아준 환자 여러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며 "환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에 생을 바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김윤광 성애의료재단·광명의료재단 이사장이 의사로서 살아온 60년 인생 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90을 바라보는 나이도 아랑곳 않고 내부회의나 외부 일정까지 모두 챙길 정도로 김 이사장의 부지런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병원 식당이며, 진료실까지 병원 구석구석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실향민 특유의 바지런함과 근검절약의 생활신조가 묻어나온다.

1949년 7월 평양의학대학을 1회로 졸업한 김 이사장은 1년이 채 안돼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마주해야 했다.

"전투기가 지나가면서 제가 숨어있는 곳으로 포탄을 떨어뜨렸는데, 천만다행으로 불발탄이었습니다."

평양에서 황해도 연안온천으로 사선을 넘어 자유의 땅 강화도 교동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고통과 죽음의 그늘은 늘 언저리를 맴돌았다.

"경황 중에 피난길에 오르다보니 의사임을 입증할 수 있는 평양의대 졸업장을 챙기지 못해 곤란했습니다. 부산에 피난 와 계신 장기려 선생님을 찾아뵈니 두말없이 확인서를 써 주셨지요."

1955년 의사국가시험이 실시됐다. 평양의대를 졸업하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던 북한에서, 그리고 8240유격부대 병원장과 논산훈련소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다시 의사면허시험을 봐야 하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김 이사장은 묵묵히 의사의 길을 걸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다.

죽을 고비 넘기며 북한 탈출

"돈이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되돌려 보내는 일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환자들을 잘 치료할 수 있도록 좋은 시설과 의료진을 갖춘 큰 병원을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1968년 논산 성애의원을 접고, 서울 영등포에 성애의원을 개원했다. 첫 날 3명이 찾아왔다. 실망하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당시에는 영양이 부족한 산모들을 위해 닭 한 마리씩 삶아주기도 했다"는 김 이사장은 "제 안사람도 직접 화장실 청소까지 하면서 병원 살림을 거들었다"고 개원초기를 떠올렸다.

야간에도 문을 두드리는 환자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진료실 불을 밝혔다. 1년 만에 한 달에 100여명 이상의 산모가 찾아왔다.

"43년 동안 성애병원에서 태어난 신생아가 13만 명 가량 됩니다. 환자들 덕분에 10년 만에 의원에서 병원으로 승격할 수 있었지요."

김 이사장은 결혼식 때 받은 구두를 20년 동안 신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손'과 '부지런함', 그리고 '근검절약' 하는 생활이 몸에 밴 까닭이다. 하지만 질 높은 진료를 위해 인력·장비·시설에 투자하는 일에는 손이 컸다.

1989년에는 100억원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부도위기에 놓인 광명병원을 인수, 광명성애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광명성애병원은 현재 31만 명이 거주하는 광명시의 유일한 종합병원으로 지역 거점병원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첨단장비와 시설을 갖추었고, 훌륭한 의사선생님들도 모셔와서 성애병원과 광명성애병원 모두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성애병원은 대학에서 정년을 하거나 명예퇴직한 원로교수들을 모셔오는 병원으로도 유명하다. 수 십 년 동안 쌓아온 경험과 젊은 의료진들의 조화가 상승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맨손으로 시작해 성애병원 개원

김 이사장은 2000년부터 대한병원협회 최장수 윤리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병원계의 원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실 한국에서보다 몽골에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1995년 한·몽골 교류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몽골과 인연을 맺은 김 이사장은 당시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대통령의 영부인이 설립한 '사랑의 재단'을 통해 몽골 전체 초등학생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분량의 연필과 공책을 지원하는가 하면 몽골에서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초청, 무료로 수술을 해 주기도 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몽골 근로자들을 위해 내국인과 동등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진료에 불편함이 없도록 몽골 출신의 통역요원까지 배치했다. 몽골 의료진을 한국으로 초청, 선진의술을 전해주는 연수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1997년 소외된 이웃을 지속적으로 돕기 위해 사재를 털어 사회복지법인 윤혜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윤혜복지재단에서는 매년 1억원 가량의 이자소득액으로 극빈자 의료비와 몽골환자의 진료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1000여명 이상의 북한 이탈 주민을 위해 진료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1년 한국을 국빈 방문한 나차긴 바가반디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성애병원을 찾아 김 이사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몽골정부는 2002년 김 이사장을 주한 몽골 인천·광명 명예영사에 임명한데 이어 2004년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한-몽 민간외교에 앞장선 김 이사장에게 몽골정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한 것.

김 이사장은 북한이탈주민과 6·25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보훈환자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기울이고 있다. 김 이사장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남한행을 택한 이북 출신이기 때문.

"1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묘소 주변에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기억이 납니다."

5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어머니 묘소를 찾지 못한 비통함은 늘 마음 한 켠에 멍으로 남아 있다. 가지 못하는 고향,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려움에 처한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한 배려로 이어졌다. 성애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를 받은 탈북자만도 수 천명이 넘는다. 탈북자 출신 의사도 성애병원에서 먹고 자며 수련을 받기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보훈환자들이 급히 보내오는 SOS도 김 이사장의 몫이다. 군의관으로 전쟁터에서 많은 환자들을 돌봐온 경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이사장은 "이웃들의 사랑과 격려가 성애병원의 오늘을 있게 했다"며 "오직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라고 겸손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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