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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확대시행 앞 둔 포괄수가제

[집중취재]확대시행 앞 둔 포괄수가제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1.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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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서비스 질 저하 불보듯"


2002년 1월부터 8개 질병군에 대해 입원진료를 하는 모든 의료기관에 질병군별 포괄수가제(DRG)를 전면실시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위기를 맞아 지난 5월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안정 및 의약분업 정착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진료비 지불방식 개선 등 비용절약적 의료이용 유도를 위해 시범사업 중인 포괄수가제를 점진적으로 확대 적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발표 이후 이 제도의 직접 이해당사자인 의료공급자와의 별다른 협의과정이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9일 복지부·건강보험심사평가원·한국보건산업진흥원 주최로 열린 DRG공청회에서 내년 전면실시를 기정사실화하자 의료계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다. DRG의 확대시행 시 의료서비스 질의 저하, DRG수가의 부당성, 중증도 분류의 불합리한 점을 들어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외과 학회 등은 전면거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으며, 의협도 15일 상임이사회를 열어 DRG대책팀을 가동키로 하고 일방적 확대시행 방침에는 절대 응할 수 없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정부는 진료비 지불방식으로 지난 23년간 사용되었던 `행위별 수가제'가 개별 단위행위 마다의 급여 및 비급여기준을 설정해야 하며, 이와 연관된 심사가 불가피하여 의료공급자의 불만을 초래해 왔고 의료비 상승, 의료제공 행태의 왜곡이 심화되었다는 입장으로 지출규모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초래되고 있는 보험재정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DRG 실시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부는 DRG를 의료비 절감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낮은 의료수가와 행위별수가제 아래서 초래된 비효율적인 진료관행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적정수가를 책정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9일 열린 공청회에서 복지부의 노연홍 험급여과장은 시범사업기간 중 참여기간이 매년 증가해 2001년 10월 현재 1,621여개소며 포괄수가 비용을 청구하게 될 예상 요양기관수의 절반이상이 DRG를 경험하고 있으며 현재 시범사업에서 이미 70%의 8개 질병군에 대해 입원진료 건이 DRG로 청구되고 있는 실정으로 확대실시에 따른 큰 혼란을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 그간의 시범사업 평가결과와 운영경험 등을 토대로 낮게 평가된 질병군에 대한 수가수준의 조정, 입원일수의 조정, DRG분류 체계의 개선, 진료비 열외군 상한금액 조정 및 질병군의 분리신설(내시경 수술, 양·단측 수술등) 등 그간 관련학회에서 건의한 사항을 중점 반영하여 진료비 지불단위 정확성과 요양기관의 수용성 제고를 위해 보다 합리적인 개선안을 검토·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내년부터 8개 질병군(수정체 수술, 편도 및 아데노이드절제술, 항문 및 항문주위수술, 서혜 및 대퇴부 탈장수술, 충수절제술, 자궁 및 자궁부속기수술, 제왕절개분만, 질식분만)에 대해 DRG의 적용을 받게될 의료기관들은 시행 2개월여를 앞두고 정부가 시행방침을 밝히고 구체적인 수가문제 등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관련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수용해 검토하겠다는 복지부 방침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정부는 시범사업을 5년간 시행하면서 여러 문제점에 대한 검토와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입장이나 의료계는 세부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우려되는 부분이 많고 또 수가 등 결정되지 않은 사항이 아직 많다며, 내년 1월 실시는 무리라는 입장이다.

의료계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DRG 확대 실시에 따른 의료서비스 질 저하의 문제. 이 문제는 연구자에 따라 상당한 시각차를 보이며, 논란이 되고 있는 부문이긴 하지만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등 취약계층에 한해 DRG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도 의료서비스 질 저하를 우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부와 DRG를 지불방식의 개선으로 옹호하는 학자들은 DRG실시 이후 의료의 질 변화가 없었다는 입장이지만 축소 진료 등 의료서비스의 질 저하는 일선 진료현장에서 가장 우려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화의대 이선희 교수(예방의학)는 “시범사업 평가결과를 보면 의료의 질 저하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영역(사망률·합병증률 등)의 지표를 중점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시범사업 평가에서는 “필수 의료서비스 제공의 저하와 같은 부분이 제외되었다”는 것으로 평가의 타당성이 결여됐다는 주장이다.

중환자와 관련해서는 DRG 지불제도가 도입되면 상당수 병원들이 중환자를 기피할 가능성이 높으며, 위험도가 높은 환자를 의료기관 간에 서로 미루는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는 가운데 중한 환자들이 몰리는 3차 의료기관에 비상이 걸렸다. 합병증 발생 가능성이 높은 환자들은 1차의료기관에서 3차기관으로 전원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3차기관은 진료원가가 상승할 수 밖에 없으며 상대적으로 어려운 시술을 하고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역차별 현상이 발생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8개 질병군에 해당되는 안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등은 학회에서 공식입장으로 DRG전면시행 반대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 진료의 80%가 DRG에 해당되는 산부인과의 경우 엄청난 위기감에 직면해 있다. 연세의대 박기현 교수(산부인과학)는 “합병증이 없는 단순분만환자와 우리나라 모성사망률의 3대 원인 중의 하나인 임신중독증(중증, 자간증)이 모두 중증도 차이가 없는 중증도 0으로 분류되어 있다”며 기가 막혀 했다.

또 “분만시 산후 출혈은 모성사망률의 수위를 차지하는 무서운 합병증으로 이 경우 응급조치로 제왕절개나 자궁적출술을 시행해야 하는 질환으로 미국에서 난이도 수위에 꼽히는 어려운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술이 단순제왕절개술과 증증도 분류가 같이 책정되어 있다”고 밝혔다. 박교수는 전면 DRG실시시 중증도가 높은 환자가 대학병원으로 몰려 대학병원의 산부인과의 도산을 가져 올 것이라며, 정부의 질병분류체계와 중증도에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정부방침이 알려지면서 3차 의료기관 산부인의사들이 대책을 위해 병원별로 모임을 갖고 있으며, 12일 전국 산부인과학교실 주임교수들이 결의대회를 갖는등 정부정책에 강한 반발을 제기하고 나섰다.

정부는 이 제도의 연착륙을 위해 현행 행위별 수가의 12%수준으로 DRG수가를 높게 책정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대학병원들은 4%가 낮게 형성됐다고 반발하는등 DRG 수가의 적정성에 대해 현재 논란이 일고 있다. 이선희 교수는 “산부인과 영역은 진흥원의 연구팀의 결과에서도 행위별 수가보다 낮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상당수 질환들이 원가수준에는 물론이고 행위별 수가보다 낮았고 특히 중증도가 높을수록 낮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현재 연구팀이 발표한 수가비교 결과는 표본수라든지 자료의 신뢰성 등 통계적 측면에서 신뢰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으며, “의료계가 미인정 행위 또는 법정 비급여로 제출한 항목 상당수가 기타 비급여로 분류되면서 DRG 수가와 비교분석 행위별 수가 자료 자체가 저평가됐다는 병원들의 반발이 있다”며 이 부분에 대한 검증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편 건강보험 재정난이 심각하여 급여범위를 축소하고 의학적으로 필요한 진료영역에 대한 삭감률이 증가하는 현 상황에서 재정소요가 더 예측되는 이 제도를 굳이 실시한 필요성이 있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의 적정수가 방침이나 DRG제도에서 환자의 본인부담을 보험에서 부담해 보험자 부담분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전면실시 3개년에 최소 1,500억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나마도 과소추계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일부 연구에서는 DRG수가를 행위별 수가 수준으로 동결하더라도 3,000억원이 넘으며 원가수준을 반영할 경우 1조1,400억여원이 소요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의료계는 어렵고 열악한 재정 여건 아래서 아직 충분히 보완되지 못한 DRG제도를 성급히 도입하려는 것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국민의 정부 들어 준비되지 않는 정책들을 실행하는 가운데 의료계가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의약분업 등 이미 시행되고 있는 각종 제도들을 추스리는 것일 급선무임을 지적하고 있다.

제도 시행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정부나 DRG에 대한 호의적 견해를 갖고 있는 연구자들의 경우 현 행위별 수가제도 아래서 진료량의 억제를 달성할 수 없고, 의료왜곡을 수가만으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보상수준보다 보상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의료보장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지불방식을 바꿔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다. 공청회에서 노연홍과장은 DRG에 관계된 모든 분야의 협력을 통해 단점이 최소화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해 의약분업과 올 의료보험재정 파탄 이후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제도의 변화로 숨돌릴 틈이 없는 의료기관과 의사들의 피해의식과 불안감이 너무나 깊다는 점을 정부는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이미 경험한 의약분업의 교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제도의 안착은 의료서비스의 제일 큰 축을 이루는 의료공급자의 자율적 협조 아래서만 가능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숙고하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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