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숙 울산의대 교수(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과)
나의 한계를 시험한 한 해
지난 한해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해외여행을 많이 한 특별한 한 해였다. 2월의 캄보디아 의료봉사와 강의를 시작으로 3월 런던·애틀란타, 5월 토론토·런던, 7월 도쿄·독일·네덜란드, 9월 샹하이, 10월 뭄바이·오사카, 11월 시카고에서의 최종 발표,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월에 이집트 카이로에 다녀왔다.
1년 사이 12번 여행에 강의만 8번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계학회의 서울 유치를 설득하고 다녔다. 힘들 줄 짐작은 했으나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든 사람으로서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이 세계학회는 언젠가는 반드시 한국에서 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초청을 수락하고 초청이 없는 학회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긴장을 하고 다녀서 그런지 돌아다닐 때에는 아주 건강하였으나 모든 여행이 끝난 후, 그리고 연이은 송년회 등으로 인하여 심한 몸살 감기로 지금 고생 좀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세계학계와의 인맥의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 우리 학회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98%의 성공, 2021년을 기약하며
세계소아심장학회는 4년에 한번 열리는, 명실상부 소아심장과·소아심장외과·소아심장마취·심장병리·중환자간호사·심폐기사 등 약 3000~4000명이 모이는 큰 행사이다.
지금까지는 유치를 신청한 두어 군데 도시들 중 세계학회 운영위원회에서 대륙 별로 옮겨가면서 개최지를 선정하였고 유치에 실패한 나라가 그 다음 개최지로 선정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달리 여섯 도시(서울·이스탄불·마드리드·하이데라바드·시카고·로마)나 신청해 경쟁이 치열해지자 운영위원회에서 공정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선정 과정을 어렵게 만든 결과 1차를 통과한 세 나라의 유치위원들은 1년 내내 이 일에 매달리게 됐다.
2009년 12월 말 공식 유치신청서를 접수하고 2010년 3월에 제안서 책자·제안서와 홍보물의 PDF화일·동영상을 제작해 운영위원들에게 제출했다. 이런 홍보물을 제작하면서 나는 관광공사 직원이 된 느낌이 들 정도로 대부분의 제안서와 홍보물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 자료들을 심사한 후 세 도시(서울·이스탄불·마드리드)가 일차후보지로 선정됐다. 그 후 이 세 도시들을 운영위원회 위원장 포함 위원 3분이 직접 현장실사를 와서 도시의 기반시설·교통·학회장 등을 둘러보고 학회 회원들을 직접 만나면서 심층 평가를 했다.
그 후 올해 11월 시카고에서 세 도시의 유치위원장들이 운영위원들 앞에서 구두발표를 한 후에 개최지가 최종 결정됐다. 예상했던 대로 이미 4년 전에 남아프리카에 한 표 차이로 패배한 이스탄불이 선정됐다.
터키의 조직위원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거대한 체구의 심장외과의사로서 발표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자기네는 전에 한번 떨어졌고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해 발표 전부터 불길한 예감을 주었다.
터키가 유치에 성공한 이유는 지난번에 한 표 차이로 떨어뜨린 이스탄불을 또 다시 떨어뜨린다는 사실에 대한 위원들의 부담감과 온정주의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그 밖의 이유로는 유치위원장이 지난 5년간 세계학회를 돌아다니며 공격적인 로비를 펼친 탓이라고 짐작된다.
이에 반해 우리의 노력은 불과 1년에 불과해 로비 파워에서 역부족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객관적인 평가수치 상으로는 서울이 우위였으나 투표권자 22명 중 대다수인 16명이 나이 많은 서양(유럽, 남·북아메리카)인들로 이들 대부분은 한국이 최근 많은 발전을 이루기는 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인상이 대단히 생소한 느낌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에 반해 이스탄불은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도시라는 선입견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역시 국가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좋아지는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도 98%의 승리라고 볼 수 있고 그 이유는 처음 우리가 유치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한국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였던 운영위원들이 최종 발표가 끝난 후에는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 그리고 한국이 세계학회를 아무 문제없이 잘 개최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운영위원들이 2021년은 우리 차례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이들의 마음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 관계, 특히 외국인과의 관계형성, 그리고 국가브랜드 향상은 단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번에 많은 투자와 노력으로 어렵게 이루어 놓은 98%의 성취 위에 나머지 2%를 채우는 것은 전적으로 젊은 세대들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국내 소아심장학 발전 위해 세계학회 개최해야
대한소아과학회 회원을 상대로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6%가 "소아청소년과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답한 것으로 드러났다.
출산율도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게다가 산전진단의 보급으로 선천성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들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소아심장 전문의들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학회유치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전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논문도 많지 않고 후원금 모으기도 어렵고 일할 사람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학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자가 줄어든다고 소아심장학이 사라져도 되는 학문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이를 평생 업으로 생각하고 더 나은 진료와 연구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소아심장(외과 포함) 의사들의 사기 진작과 발전을 위해서도 세계학회 개최는 반드시 필요하다.
오히려 외부환경이 어려워 질수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개인이나 병원, 대학의 개별 업적을 넘어 다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모델을 모색해야 하며 세계학회 개최는 이를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학회 개최 국가브랜드 가치 높이는 지름길
이렇게 단 시일 내에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그리고 현장 실사단을 안내하면서 얻은 결론은 국가 브랜드의 중요성이었다.
국가 브랜드는 GNP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 국가 이미지가 실제보다 너무나도 저평가된 블루 칩 국가는 한국이라는 사실, 국가 브랜드 향상은 단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학회 개최가 국가브랜드 향상의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즉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외국인, 특히 선진국 사람들을 한국에 데려와서 직접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세계학회에 참석하는 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교수·의사·과학자·정책입안자·공무원·정치가 등 사회 지도층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세계 학회 개최는 학문의 질 향상과 국내 학회의 국제적인 위상 강화, 나아가서 수 천명의 전문가들이 방한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준다.
우리의 예를 보더라도 2008년에 제주도에서 개최한 아시아 태평양 소아심장학회에 참석자 대부분이 이번 세계학회 유치도 적극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아태학회를 끝낸 후 우리나라 소아심장학회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이 한번이라도 한국에 왔던 분들은 대개 우리의 친구로 만들 수 있다. 반면에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분들에게 한국을 지원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세계학회 유치 성공하려면
첫째, 일단 작은 국제학회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경우 미리 전향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점진적으로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넓혀간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 학회에서 먼저 제안해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가 각자의 국내학회와 연계해 세 나라만의 국제학회를 열었다.
2005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여섯 차례 학회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학문 교류는 물론 중국·일본 의사들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해졌다. 이와 거의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소아심장학회도 결성됐고, 2008년 제주도에서 열린 2차 학회에는 29개국에서 720명 이상이 참여해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 번의 아태 학회에 참가하면서 이번 세계학회 유치에 큰 도움과 지원을 받았다.
둘째, 가능하면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또는 결정권을 가진 의사를 국내 학회에 초빙하는 전략을 미리 세워야 한다. 한국을 한번이라도 다녀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한국에 대한 인식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그리고 한국에 한번도 초청받지 못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대가"라는 사람들은 일단 한국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은근히 자신들이 한번도 한국에 초대받지 못한데 대한 불편한 감정 때문으로 보였다.
이제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 중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제학자들이나 사업가들, 즉 돈의 흐름에 민감한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상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단히 보수적인 의사들, 특히 북미나 유럽의 나이 많은 의사들(대개 이런 분들이 투표권이 있다)은 한국에 대해 딱히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분들은 특히 한국이라고 하면 한국전쟁·입양아·북한 핵 같은 좋지 않는 일들만 떠올린다.
한국에 관한 좋은 일이라고는 김연아 정도이다. 국제사회에서 인맥을 쌓으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학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평소에 이들과 지속적인 친분을 유지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박인숙 울산의대 교수
지난 11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소아심장학회 서울 유치를 위한 제안발표를 끝낸 후 유치 과정에서 비싸게 얻은 소중한 경험과 그 동안의 경과를 학회에 알리는 글을 쓰려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 국가차원의 대형 사건들이 터지는 바람에 차일 피일 미루다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다.
지난 1년 간의 유치과정에서 비싸게 얻은 소중한 경험이 세계학회를 유치하고자 하는 국내 단체들에게, 또한 아직 유치 계획이 없는 학회나 단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